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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심사 청구(야스쿠니 방화 범죄인 인도 청구 사건)

[서울고법 2013. 1. 3. 자 2012토1 결정 : 확정]

【판시사항】

[1] 대한민국이 일본에 범죄인을 인도할 의무가 있는지 판단할 때 적용할 법규
[2] 범죄인 인도절차에서 논의되는 ‘정치적 범죄’의 개념과 유형 및 어떠한 범죄가 정치적 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기준
[3]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 제3조에서 정한 ‘정치적 범죄’의 의미 및 이른바 ‘상대적 정치범죄’가 여기에 포함되는지 여부(적극)
[4] 일본 정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에 항의하고 그와 관련된 대내외 정책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일본 소재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신문(神門)에 방화하여 일부를 소훼함으로써 공공의 위험을 발생하게 하였다는 범죄사실로 국내에 구금 중인 중국 국적의 범죄인 甲에 대하여, 일본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인도를 청구한 사안에서, 인도 대상 범죄는 이른바 상대적 정치범죄로서 위 조약 제3조 (다)목 본문에서 정한 ‘정치적 범죄’에 해당하고, 달리 범죄인을 인도하여야 할 예외사유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인도거절 결정을 한 사례

【판결요지】

[1]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2002. 4. 8. 체결하여 2002. 6. 21.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이하 ‘인도조약’이라 한다)은 국회의 비준을 거친 조약으로서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므로, 대한민국이 일본에 대하여 범죄인을 인도할 의무가 있는지 판단할 때에는 신법 우선의 원칙, 특별법 우선의 원칙 등 법률해석의 일반원칙과

‘범죄인 인도법’ 제3조의2의 규정 취지에 따라 인도조약이 ‘범죄인 인도법’에 우선하여 적용되고, ‘범죄인 인도법’은 인도조약의 취지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인도조약을 보충하여 적용된다.


[2] 오늘날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경향에 따르면, 범죄인 인도절차에 있어 ‘정치적 범죄’는 사인, 사적인 재산 또는 이익을 침해함이 없이 오로지 해당 국가의 정치질서에 반대하거나 해당 국가의 권력관계나 기구를 침해하는 행위인 ‘절대적 정치범죄’ 내지 ‘순수한 정치범죄’와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저지른 일반범죄인 ‘상대적 정치범죄’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서 절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에 해당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대부분 일치하고 있으나, 상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로서 간주되기 위한 기준은 국제적으로 아직 확립되지 못하여 국가마다 서로 다른 관행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 경향 등을 고려해 볼 때 어떠한 범죄, 특히 상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인지 판단할 때에는, ① 범행 동기가 개인적인 이익 취득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이나 기구가 추구하는 목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인지, ② 범행 목적이 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전복 또는 파괴하려는 것이거나 그 국가의 대내외 주요 정책을 변화시키도록 압력이나 영향을 가하려는 것인지, ③ 범행 대상의 성격은 어떠하며, 나아가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④ 범죄인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데 범행이 상당히 기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유기적 관련성이 있는지, ⑤ 범행의 법적·사실적 성격은 어떠한지, ⑥ 범행의 잔학성, 즉 사람의 생명·신체·자유에 반하는 중대한 폭력행위를 수반하는지 및 결과의 중대성에 비춰 범행으로 말미암은 법익침해와 정치적 목적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지 등 범죄인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주관적·객관적 사정을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취지에 비추어 합목적적·합리적으로 고찰하여 종합적으로 형량하고, 여기에다 범행 목적과 배경에 따라서는 범죄인 인도 청구국과 피청구국 간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 차이 및 입장 대립과 같은 정치적 상황 등도 고려하여, 상대적 정치범죄 내에 존재하는 일반범죄로서 성격과 정치적 성격 중 어느 것이 더 주된 것인지를 판단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3]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이하 ‘인도조약’이라 한다) 및 ‘범죄인 인도법’의 규정 형식의 유사성에다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 경향,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 보면, 인도조약 제3조 (다)목 본문에서 말하는 ‘정치적 범죄’는

‘범죄인 인도법’ 제8조 제1항에서 정한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이거나 그와 관련된 범죄’와 같은 의미로서, 절대적 정치범죄뿐 아니라 상대적 정치범죄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4]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에 항의하고 그와 관련된 대내외 정책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일본 소재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신문(神門)에 방화하여 일부를 소훼함으로써 공공의 위험을 발생하게 하였다는 범죄사실로 국내에 구금 중인 중국 국적의 범죄인 甲에 대하여, 일본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이하 ‘인도조약’이라 한다)에 따라 인도를 청구한 사안에서, ① 범행 동기가 일본 정부의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정책에 대한 분노에서 기인한 것으로, 범죄인에게 개인적인 이익을 취득하려는 동기를 찾아볼 수 없는 점, ② 범행 목적이 범죄인 자신의 정치적 신념 및 견해와 반대 입장에 있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것인 점, ③ 범행 대상인 야스쿠니 신사가 법률상 종교단체의 재산이기는 하나 국가시설에 상응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점, ④ 범행이 정치적인 대의를 위하여 행해진 것으로서 범행과 정치적 목적 사이에 유기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점, ⑤ 범행의 법적 성격은 일반물건 방화이나 실제로는 오히려 손괴에 가깝고 방화로 말미암은 공공의 위험성 정도가 크지 않은 점, ⑥ 범행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전혀 없고 물적 피해도 크다고 할 수 없어 범행으로 야기된 위험이 목적과 균형을 상실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 제반 사정과 범죄인 불인도 원칙의 취지, 청구국인 일본과 피청구국인 대한민국, 나아가 범죄인의 국적국인 중국 간의 역사적 배경,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 차이 및 의견 대립과 같은 정치적 상황,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대다수 문명국가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 등을 종합해 볼 때, 인도 대상 범죄는 일반물건 방화라는 일반범죄 성격보다 정치적 성격이 더 큰 상대적 정치범죄로서 인도조약 제3조 (다)목 본문에서 정한 ‘정치적 범죄’에 해당하고, 달리 범죄인을 인도하여야 할 예외사유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인도거절 결정을 한 사례.

【참조조문】

[1]

헌법 제6조 제1항,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 제1조,

범죄인 인도법 제3조의2
[2]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 제3조 (다)목,

범죄인 인도법 제8조 제1항
[3]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 제3조 (다)목,

범죄인 인도법 제8조 제1항
[4]

헌법 제6조 제1항,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 제2조 제1항, 제3조 (다)목, (바)목, 제4조 (다)목, 제8조, 제9조, 제12조 제1항,

범죄인 인도법 제3조의2,

제8조 제1항,

제11조,

제12조,

제13조,

제14조,

제15조,

형법 제167조 제1항, 일본 형법 제110조 제1항


【참조판례】

[2]

대법원 1984. 5. 22. 선고 84도39 판결(공1984, 1163)



【전문】

【범 죄 인】

【청 구 인】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청 구 국】

일본국

【변 호 인】

법무법인 세종 담당변호사 명동성 외 6인

【주 문】

범죄인을 청구국에 인도하는 것을 허가하지 아니한다.

【이 유】

1. 인도심사청구의 요지
청구인은 2012. 11. 8. 청구국으로부터 범죄인에 대한 2012. 5. 21.자 인도청구가 있음을 이유로, 대한민국과 청구국 사이에 2002. 4. 8. 체결하여 2002. 6. 21.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이하 ‘이 사건 조약’이라 한다) 제2조, 제8조의 규정에 따라 범죄인의 인도허가 여부에 관한 심사를 청구하였다.
 
2.  인도심사청구의 대상 범죄사실과 적용법규 
가.  범죄사실의 요지
범죄인은 2011. 12. 26. 03:56경 청구국 도쿄도(東京都) 지요다구(千代田區) 구단키타(九段北) 3정목(丁目) 1번(番) 1호(號) 소재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신문(神門) 앞에서 위 신문 중앙문 남쪽 기둥에 휘발유 같은 액체를 뿌리고 소지한 라이터로 불을 붙여 위 신사 대표임원인 교고쿠 다카하루가 관리하는 위 신사의 신문 일부를 소훼함으로써 위 신문 부근 건조물 등에 연소할 우려가 있는 등 공공의 위험을 발생하게 하였다.
 
나.  인도심사청구의 적용법규
이 사건 인도심사청구에 관한 적용법규로는, 국내법으로서 1988. 8. 5. 공포되어 시행되고 있는 ‘범죄인 인도법’이 있고, 조약으로서 이 사건 조약이 있는데,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6조 제1항), 이러한 헌법 규정 아래에서는 국회의 동의를 요하는 조약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국회의 동의를 요하지 않는 조약은 대통령령과 같은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함이 타당하므로, 이 사건 조약은 국회의 비준을 거친 조약으로서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또한 범죄인 인도법 제3조의2에 따르면 ‘범죄인 인도에 관하여 인도조약에 이 법과 다른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그 규정에 따른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청구국에 대하여 범죄인을 인도할 의무가 있는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신법 우선의 원칙, 특별법 우선의 원칙 등 법률해석의 일반원칙과 위 범죄인 인도법의 규정 취지에 따라 이 사건 조약이 범죄인 인도법에 우선하여 적용되고, 범죄인 인도법은 이 사건 조약의 취지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이 사건 조약을 보충하여 적용된다.
 
3.  인도허가 여부에 관한 판단 
가.  기초 사실
다음 사실은 범죄인 및 증인 청구외 1의 이 법정에서의 각 진술과 기록에 의하여 인정된다.
1) 범죄인의 가족력
범죄인은 1974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취학 전까지 부모와 떨어져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취학 후에도 외할머니가 1985년 12월 사망하기 전까지 방학 때마다 외할머니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외할머니는 사망하기 전까지 가족 및 친지에게 평생 감추어 왔던 다음과 같은 자신의 과거를 범죄인에게 알려주었다.
외할머니는 한국인으로서 본명이 청구외 2(개명 후 이름 생략)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살다가 1942년경 목포항을 통하여 중국에 끌려가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가 되어 고초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중국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범죄인의 외할아버지와 결혼하여 범죄인의 어머니인 청구외 1를 낳았으며, 외증조할아버지 청구외 3은 1940년대 초 서울 소재 중학교의 교사로 일하던 중 몰래 한국어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하였다.
한편 범죄인의 할아버지 청구외 4는 항일 신사군(新四軍)의 단장으로서 전투원을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하다가 1945년 전사하여, 1983년 중국 정부로부터 혁명열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범죄인은 인터넷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2005년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는 등 항의를 했으며, 2006년에는 청구국의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에 대해 시위를 하고, 주중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기도 하였다.
2) 이 사건 범행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범죄인은 1997년 대학 졸업 후 광저우의 학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였고, 심리치료학을 공부하여 2007년경 심리치료사 자격을 취득한 후 2008년부터는 심리치료사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2011. 3. 11. 동일본대지진 참사가 일어나자 2011. 10. 3. 재해지역 주민에 대한 심리치료 자원봉사를 위하여 청구국으로 갔다.
범죄인은 청구국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현지 생활에 적응하면서 상담치료 등 봉사활동을 하던 중 2011. 12. 18.경 한일 정상회담 당시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과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해결을 촉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구국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그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일본군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고, 아울러 청구국 국회의원들이 집단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전쟁 피해자의 후손인 범죄인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을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방화함으로써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우경화 정책을 펼치며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청구국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따라 범죄인은 범행 날짜를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외할머니의 기일이자 중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의 생일인 2011. 12. 26.로 정하고, 범행 시간도 인명 피해 우려가 적은 새벽으로 하면서 할아버지가 속하였던 ‘신사군’에 ‘사(四)’가 들어 있는 점과 일본 제국주의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와 위 ‘사(四)’가 같은 발음인 점 등을 고려하여 오전 4시를 선택한 후, 이 사건 범행을 준비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널리 알리기 위하여 준비도구 및 ‘사죄’라고 적힌 셔츠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촬영함은 물론 범행의 실행 과정까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였다.
3) 이 사건 범행의 실행
범죄인은 2011. 12. 26. 03:40경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하여 그 담을 넘어가 위 신사 신문 중앙문 남쪽 기둥에 접근한 후 미리 준비한 휘발유 5ℓ 중 2~3ℓ가량을 뿌리고, 같은 날 03:56경 라이터로 불을 붙여 위 신사의 신문 일부를 소훼하였다.
4) 이 사건 범행 대상 및 피해 현황
한편 범죄인이 방화한 야스쿠니 신사의 신문은 폭 약 27.5m, 높이 약 14m의 목조 문으로서, 문 중앙에는 한쪽 폭이 2.9m, 높이 6.3m의 쌍 바라지 문이, 중앙문의 남북 양쪽에는 한쪽 폭이 2.1m, 높이 4.9m의 쌍 바라지 문이 각각 설치되어 있으며, 신문에 접하여 남북에 직경 1.2m, 높이 약 11.5m의 목조 노송나무제 원기둥 지주(이하 ‘중앙문 원기둥 지주’라 한다)가 4개 있으며 그 원기둥 지주의 동서 양쪽에는 남북에 각각 직경 0.8m, 높이 약 8.5m의 목조 노송나무제 원기둥 지주가 4개씩 설치되어 있어 합계 12개의 지주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이 사건 불에 탄 원기둥 지주는 중앙문 원기둥 지주 중 남쪽에서 두 번째 원기둥 지주로서 그 북면에 있는 홈에 각기둥 지주가 짜 넣어져 있다.
이 사건 불에 탄 원기둥 지주와 각기둥 지주의 접합 부분은 약 1cm 틈이 나 있으며 원기둥 지주 내부 남쪽 부분이 폭 약 1cm, 높이 155cm 범위 내에서 귀갑(龜甲) 상태로 소손되어 있고, 위 원기둥 지주에 있는 홈의 동쪽 부분에는 폭 2cm, 높이 155cm의 범위에서 소손되어 있으며, 위 각기둥 지주 남단에서 북쪽으로 폭 2.5cm, 높이 155cm의 범위에서 소손되어 있다. 결국 소손된 부분은 위 원기둥 및 각기둥 연결 부분 4군데(125c㎡, 68.75c㎡, 155c㎡, 310c㎡)이고, 그 외에도 위 원기둥 하부 1군데(261c㎡), 위 각기둥 하부 1군데(34c㎡)가 소손되어 있다.
이 사건 신문 부근 건조물은 2채가 있는데, 그 중 북쪽에 있는 능악당(能樂堂)은 목조 건물로서 그 목담이 발화지점으로부터 31.5m, 남쪽에 있는 사무소는 철근콘크리트 건물로서 발화지점으로부터 35m 떨어져 있다.
이 사건 범행 대상인 야스쿠니 신사는 주간에는 책임자 이하 경비원 13명, 야간에는 경비원 2명이 교대로 경계를 담당하면서 도보로 순회하거나 방범 카메라를 통하여 신사 안팎을 대기소의 모니터로 항상 확인하고 있으며 신문 안쪽에는 센서 장치가 가동되어 있는 등 평소에도 방화에 신경을 써서 경계하고 있고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즉시 발견하여 진화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실제로 이 사건 범행 직후 모니터를 확인하던 야스쿠니 신사 경비원에 의하여 바로 화재 사실이 발견되어 소화기로 소화되었으며, 이 사건 범행으로 말미암은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5) 이 사건 범행 후의 전개상황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후 인터넷 블로그에 이 사건 범행에 관한 경위와 소회를 밝혔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이 사건 신문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전소시킨다는 것은 100ℓ에 가까운 휘발유로 30분이나 걸릴 정도로 하기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에는 흔적만 남기기로 하고 뒤를 이어주는 이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취지로 기재되어 있다.
청구국 수사기관은 수사 초기에는 이 사건 범행을 기물손괴 피의사건으로 수사하다가, 2012. 1. 12. 도쿄대학교 이과대학 종합연구소 부속 화재과학연구센터 소속 교수의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그 의견의 요지는 ‘원기둥과 각기둥의 접합 부분에 귀갑 상태가 인정되며 기둥 밑 부분에도 탄화가 인정되므로 독립연소하였다고 인정하고, 귀갑 상태가 높이 1.5m까지 있고 접합 부분이 홈처럼 생긴 상태로 연돌효과로 인하여 위쪽으로 불이 빨리 도달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어 당해 문이 전소될 우려가 있고 불이 번질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사무소나 능악당 등이 연소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청구국 수사기관은 2012. 1. 12. 및 1. 13. 재실황조사 등을 거쳐 그 이후부터는 이 사건 범행을 건조물 등 이외 방화 피의사건으로 수사하였다.
한편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 직후 항공편으로 대한민국으로 왔고,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동안 외할머니와 연고가 있던 목포, 대구 등지와 외증조할아버지가 사망한 서울 서대문형무소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범죄인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항의집회를 하여 2011. 12. 14. 1,000번째 집회가 개최되었음에도 청구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는 현실에 격분하여, 청구국 정부를 상대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2012. 1. 6. 주한 일본대사관 건물에 화염병을 던져 이를 소훼하려 하였다.
범죄인은 이러한 행위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12. 5. 23. 현존건조물방화미수죄 등으로 징역 10월의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항소기각으로 2012. 8. 31. 판결이 확정되어, 2012. 11. 6. 그 형의 집행을 종료하였다.
한편 청구국은 2012. 5. 21. 이 사건 범행이 청구국 형법 제110조 제1항(건조물 등 이외 방화)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하면서 이 사건 조약에 따라 범죄인의 인도를 청구하였고,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으로 발부된 인도구속영장에 의하여 2012. 11. 6. 구속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나.  인도 대상 범죄 해당 여부
이 사건 조약에 의하면, 양 당사국은 이 사건 조약의 규정에 따라 인도 대상 범죄에 대한 기소·재판이나 형의 집행을 위하여 자국의 영역에서 발견되고 타방 당사국에 의하여 청구되는 자를 타방 당사국에 인도하여야 할 의무가 있고(제1조), 인도 대상 범죄는 인도청구 시 양 당사국의 법에 의하여 사형·종신형이나 1년 이상의 자유형(deprivation of liberty for a maximum period of at least one year)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로 정하고 있는데(제2조 제1항),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인도심사청구의 대상 범죄사실은 청구국의 형법 제110조 제1항(건조물 등 이외 방화)에 따라 징역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한편 대상 범죄사실은 우리 형법 제167조 제1항(일반물건에의 방화)에 따라 징역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범죄에 해당하므로, 결국 대상 범죄사실은 이 사건 조약상 양 당사국의 법에 따라 장기 1년 이상의 자유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로서 인도 대상 범죄에 해당한다.
 
다.  인도거절사유에 관한 당사자의 주장
범죄인 및 변호인은, 이 사건 인도심사청구 대상 범죄는 정치적 범죄에 해당하여 이 사건 조약에 따라 범죄인의 인도가 허용되지 아니하므로 범죄인에 대한 인도를 허가하여서는 아니 되고, 설령 정치적 범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사건은 범죄인의 인종, 국적, 민족적 기원,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기소·처벌하기 위하여 인도청구가 이루어졌거나 범죄인의 지위가 그러한 이유로 침해될 것이라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고, 또한 범죄인의 연령·건강 또는 그 밖의 개인적 정황 때문에 그 범죄인 인도가 인도적 고려와 양립될 수 없으므로 범죄인에 대한 인도를 허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청구인은, 이 사건 범행이 전쟁·혁명·반란 등 폭력적·정치적 소란 상황에 수반된다고 보기 어려워, 정치질서나 조직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므로 정치적 범죄라고 볼 수 없고, 범죄인의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방화를 이유로 처벌하고자 범죄인 인도를 구하는 것이며, 범죄인에게 조울증 증세가 있다고 하나 감정 결과 경미한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범죄인 인도가 인도적 고려와 양립될 수 없는 경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라.  관련 규정
이 사건 조약상 이 사건과 관련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3조 (절대적 인도거절) 다음의 경우에는 이 조약에 따른 범죄인의 인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 가. 생략 나. 생략 다. 인도청구되는 범죄가 정치적 범죄이거나 인도청구가 정치적 범죄로 기소·재판 또는 처벌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고 피청구국이 판단하는 경우. 다만 다음의 범죄는 그 자체만으로는 정치적 범죄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1) 일방당사국의 국가원수·정부수반이나 그 가족구성원임을 알고 행한 그들에 대한 살인, 그 밖의 고의적 폭력범죄 또는 처벌할 수 있는 그러한 범죄의 미수행위 (2) 양 당사국이 모두 당사자인 다자간 국제협정에 의하여 당사국이 인도 대상 범죄에 포함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는 범죄 라. 생략 마. 생략 바. 인도청구되는 자의 인종, 종교, 국적, 민족적 기원, 정치적 견해 또는 성별을 이유로 기소·처벌하기 위하여 인도청구가 이루어졌거나 그 자의 지위가 그러한 이유로 침해될 것이라고 피청구국이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제4조 (임의적 인도거절) 다음의 경우에는 이 조약에 따른 범죄인의 인도가 거절될 수 있다. 가. 생략 나. 생략 다. 피청구국이 인도청구되는 자의 연령·건강 또는 그 밖의 개인적 정황 때문에 그 범죄인 인도가 인도적 고려와 양립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경우 라. 생략
‘범죄인 인도법’상 이 사건과 관련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8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 등의 인도거절) ① 인도범죄가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이거나 그와 관련된 범죄인 경우에는 범죄인을 인도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인도범죄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국가원수·정부수반 또는 그 가족의 생명·신체를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범죄 2. 다자간 조약에 따라 대한민국이 범죄인에 대하여 재판권을 행사하거나 범죄인을 인도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범죄 3. 여러 사람의 생명·신체를 침해·위협하거나 이에 대한 위험을 발생시키는 범죄 ② 생략
 
마.  이 사건의 쟁점
따라서 이 사건의 쟁점은, 1)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가 이 사건 조약 제3조 (다)목에서 정한 절대적 인도거절사유인 ‘정치적 범죄인지 여부’와 2) 이 사건 조약 제3조 (바)목에서 정한 절대적 인도거절사유인 ‘범죄인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기소·처벌하기 위하여 범죄인 인도청구가 이루어졌거나 범죄인의 지위가 그러한 이유로 침해될 것인지 여부’, 3) 이 사건 조약 제4조 (다)목에서 정한 상대적 인도거절사유인 ‘범죄인의 연령·건강 또는 그 밖의 개인적 정황 때문에 이 사건 범죄인 인도가 인도적 고려와 양립될 수 없는지 여부’라 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의 쟁점을 중심으로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의 경향,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 이 사건 조약상 정치적 범죄의 의미, 그리고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가 정치적 범죄에 해당하는지를 차례대로 살펴본다.
 
바.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국제법 학자들은 범죄인 인도절차에 있어 정치적 범죄의 개념을 ‘자연범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또는 반공서양속적인 것으로서 국가가 제정해 놓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유책한 것이지만, 국가권력 담당자에게 반대하더라도 국민 다수의 잠재적인 정의감정 또는 국민 일부의 도덕적 감정에는 합치하는 범죄’라고 하거나, ‘특정 국가의 기본적 정치질서를 교란·파괴할 목적을 가지고 보통법상의 중대범죄 이외의 방법으로 형벌 법령을 위반하여 그 법익을 침해하거나 침해할 위험이 존재하는 모든 행위’라고 하는 등 그 개념에 대한 정의(定義)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정치적 범죄라는 개념은 법 영역 중에서 가장 논란이 있는 개념에 속하고, 국제적으로 정치적 범죄의 개념이 일정하게 인정된다기보다는 다른 범죄군보다 훨씬 더 강하게 각각의 국가형태와 헌법, 통치구조에 의해 좌우되고, 국가적 이익 또는 수호되는 법익에 좌우되는 등 현재까지의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걸쳐 인정받을 수 있는 정의(定義)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경향에 따르면, 정치적 범죄는 사인, 사적인 재산 또는 이익을 침해함이 없이 오로지 해당 국가의 정치질서를 반대하거나 해당 국가의 권력관계나 기구를 침해하는 행위인 ‘절대적 정치범죄’ 내지 ‘순수한 정치범죄’와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저지른 일반범죄, 즉 ‘상대적 정치범죄’로 나눌 수 있고, 학설에 따라서는 후자의 경우를 다시 하나의 행위가 정치질서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구성하는 ‘복합적 정치범죄’와 절대적 정치범죄 또는 복합적 정치범죄를 수행하거나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또는 그 행위자의 보호를 위하여 범하는 행위인 ‘관련적 정치범죄’, 정치적 성격이 우월한 상황에서 범하여진 일반범죄나 정치활동에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일반범죄인 협의의 ‘상대적 정치범죄’로 나누고 있다.
여기에서 절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에 해당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대부분 일치하고 있으나, 상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로서 간주되기 위한 기준에 관해서는 국제적으로 아직 확립되지 못하여 국가마다 서로 다른 관행을 발전시켜 왔고, 각국의 실정법이나 각국 사이에 체결한 범죄인 인도조약에서도 정치적 범죄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거나 통일하여 그에 구속되려 하지 않고 이에 대한 해석을 범죄인 인도 피청구국의 국내법과 학설에 맡겨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 사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범죄에 관한 피청구국의 법적 판단은 그 국가의 법적 관점과 정치체제를 반영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과거에는 상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으나 최근 국제적 형사사조는 이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바, 실제로 뒤에서 보는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적용이 문제 되는 것은 대부분 상대적 정치범죄를 둘러싼 다툼이다.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으로서, 영미법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범죄가 정치적 소란에 부수하고, 그 일부를 구성할 것을 요건으로 하는 부수성 이론을 채택하였다. 대륙법계에서는 주관적 요소로만 판단하는 주관설, 객관적 요소로만 판단하는 객관설, 양자를 모두 고려하는 절충설로 나뉘어 전개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범죄의 성격을 범죄인의 동기로 판단하는 동기 이론, 침해된 권리의 성격에 따라 판단하는 침해된 권리 이론, 당해 보통범죄가 정치적 운동에 부수되어야 함을 전제로 범죄인의 동기, 목적 및 범죄가 저질러진 상황을 고려하여 범죄의 성격이 우월적으로 정치적인 경우 정치적 범죄로 판단하는 우월성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영미법계에서도 객관설에 편향된 부수성 이론의 엄격한 고수를 포기하고 무차별성, 필요성 및 비례성 등의 개념과 다양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정치적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다수 판례가 나오고 있고, 대륙법계 중 침해된 권리 이론을 취하던 국가도 범죄인의 동기를 중시하거나 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우월성 이론에 가까운 기준을 채택한 판례도 적지 않으며, 우월성 이론을 따르는 국가도 당해 보통범죄가 정치적 운동에 부수되어야 한다는 요건을 사실상 폐기하는 등 지금은 순수한 의미의 주관설이나 객관설보다는 범행의 주관적·객관적 요소 및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형태로 제도를 운용하는 국가가 다수라고 할 수 있다.
 
사.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의 경향
오늘날과 달리 중세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에서의 범죄인 인도 제도는 선린 국가 간 정치범의 인도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었으나,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다양한 정치체제가 등장하고 근대 인권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정치범 불인도 원칙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벨기에가 1834년 범죄인 인도법에 처음으로 정치범 불인도 원칙을 도입한 이래 지금은 세계 대부분 국가가 국내법과 조약에 정치적 범죄를 범하고 소추를 면하기 위하여 다른 국가로 피난해 오는 경우에는 정치범 불인도 원칙에 의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법상 확립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대법원 1984. 5. 22. 선고 84도39 판결 참조).
이러한 정치범 불인도 원칙은 20세기 들어 이른바 동서냉전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고, 그 외에도 탈식민지 투쟁이나 남북문제의 심화, 이슬람 원리국가의 출현 등과 같은 시대적 상황의 전개와 함께 그 적용이 확대되었다.
정치범 불인도 원칙은 개인에게는 정치적 변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정치적 활동에 호소할 수 있는 천부적인 권리가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서, 통상 범죄인이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적 목적과 일치하는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로 피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경우 그 범죄인을 인도하는 것은 곧 범죄인 인도 피청구국의 정치질서나 체제의 가치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어 불합리한 점 및 설사 피청구국이 범죄인이 주장하는 정치적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질서나 체제를 가진 국가라 할지라도 국제관계상 타국의 국내 문제에 대한 관여를 지양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며, 아울러 정치범에게 형벌을 가하더라도 확신범의 성격을 가지는 이상 그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를 억제할 수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만 정치범 불인도 원칙은 본래부터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 당사국 간의 합의에 따라 제한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범죄 유형에 관하여는 다자간 국제조약을 통하여 위 원칙이 제한되는 경향이 뚜렷한데, 이러한 예외가 인정되는 국제범죄의 유형으로는 인륜에 반하는 범죄, 집단살해, 전쟁범죄, 해적행위, 항공기 납치행위, 노예·인신매매 기타 부녀 및 아동 거래행위, 국제마약거래, 고문, 폭탄 테러행위 등 중대한 범죄가 열거되고 있다.
한편 정치범 불인도 원칙이 적용되는 정치적 범죄의 범위를 넓히는 경향도 존재한다. 즉 정치범 불인도의 대상이 되는 정치범을 적극적인 정치범뿐만 아니라 정치적 박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하여 정치범의 인정 범위를 넓히고, 인권보호를 위하여 인도 대상자가 차별적으로 취급될 우려가 있는 경우 인도를 거부하는 이른바 ‘차별조항’을 규정하는 조약이나 입법례가 증가하고 있다.
 
아.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
이러한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의 경향 등을 고려해 볼 때, 어떠한 범죄, 특히 상대적 정치범죄가 정치적 범죄인지 여부에 관한 판단에 있어서는, ① 범행 동기가 개인적인 이익 취득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이나 기구가 추구하는 목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인지, ② 범행 목적이 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전복 또는 파괴하려는 것이거나, 그 국가의 대내외 주요 정책을 변화시키도록 압력이나 영향을 가하려는 것인지, ③ 범행 대상의 성격은 어떠하며, 나아가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④ 범죄인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데 범행이 상당히 기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유기적 관련성이 있는지, ⑤ 범행의 법적·사실적 성격은 어떠한지, ⑥ 범행의 잔학성, 즉 사람의 생명·신체·자유에 반하는 중대한 폭력행위를 수반하는지 및 결과의 중대성에 비추어 범행으로 말미암은 법익침해와 정치적 목적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지 등 범죄인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주관적·객관적 사정을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취지에 비추어 합목적적·합리적으로 고찰하여 종합적으로 형량하고, 여기에다가 범행 목적과 배경에 따라서는 범죄인 인도 청구국과 피청구국 간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및 입장의 대립과 같은 정치적 상황 등도 고려하여, 상대적 정치범죄 내에 존재하는 일반범죄로서의 성격과 정치적 성격 중 어느 것이 더 주된 것인지를 판단하여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자.  이 사건 조약상 ‘정치적 범죄’의 의미
이 사건으로 돌아와 보건대, 이 사건 조약 제3조 (다)목은 ‘인도청구되는 범죄가 정치적 범죄라고 피청구국이 판단하는 경우(when the requested party determines that the offense for which extradition is requested is a political offense ……)’에는 이 조약에 따른 범죄인의 인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절대적 인도거절사유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을 뿐, 별도로 ‘정치적 범죄(political offense)’의 의미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지 않은 채 전적으로 피청구국의 판단하에 결정할 사항으로 유보하고 있다.
범죄인 인도법도 마찬가지로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이거나 그와 관련된 범죄’는 범죄인의 인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고만 규정할 뿐 정치적 범죄의 정의와 범위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결국 정치적 범죄의 의미와 범위는 위 각 규정의 내용에 근거하여 피청구국이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절대적 인도거절사유에 관한 이 사건 조약의 규정 형식에 관하여 보면, 우선 제3조 (다)목 본문에 위와 같이 정치적 범죄에 관하여는 범죄인 인도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선언한 다음, 그 단서에서 ‘일방 당사국의 국가원수·정부수반이나 그 가족구성원임을 알고 행한 그들에 대한 살인, 그 밖의 고의적 폭력범죄 또는 처벌할 수 있는 그러한 범죄의 미수행위’, ‘양 당사국이 모두 당사자인 다자간 국제협정에 의하여 당사국이 인도 대상 범죄에 포함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는 범죄’의 경우에는 그 자체만으로는 정치적 범죄로 해석되지 아니한다는 예외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범죄인 인도법도 이 사건 조약과 마찬가지로 제8조 제1항에서 ‘인도범죄가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이거나 그와 관련된 범죄인 경우에는 범죄인을 인도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한 후, 그 단서에서 ‘국가원수·정부수반 또는 그 가족의 생명·신체를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범죄’, ‘다자간 조약에 의하여 대한민국이 범죄인에 대하여 재판권을 행사하거나 범죄인을 인도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범죄’, ‘다수인의 생명·신체를 침해·위협하거나 이에 대한 위험을 야기하는 범죄’를 정치범 인도거절의 예외사유로 열거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 사건 조약 및 범죄인 인도법의 규정 형식의 유사성에다가 앞에서 본 정치적 범죄의 개념 및 유형,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발전 과정 및 최근의 경향,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조약 제3조 (다)목 본문에서 말하는 ‘정치적 범죄’는 범죄인 인도법 제8조 제1항 소정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이거나 그와 관련된 범죄’와 같은 의미로서, 절대적 정치범죄뿐 아니라 상대적 정치범죄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함이 상당하다.
 
차.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가 정치적 범죄인지 여부
1) 유의할 판단요소
먼저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는 오로지 해당 국가의 정치질서를 반대하거나 해당 국가의 권력관계나 기구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반범죄의 성격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이를 절대적 정치범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가 상대적 정치범죄라고 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라고 할 것인데, 이하에서는 앞서 본 정치적 범죄의 판단 기준에서 제시한 판단요소별로 살피기로 한다.
다만 유의할 점은, 지금까지의 정치적 범죄에 관한 논의가 한 국가의 질서를 침해하거나 정치형태의 변경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상대적으로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동서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립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반면, 개별 국가 간 역사적·민족적 조건하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 및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얽힌 분화가 심화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한 국가가 취하고 있는 대내외 주요 정책을 반대하여 이를 변화시키도록 영향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도 오늘날 정치적 범죄에 관한 논의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과 연결지어 보면, 종래 상대적 정치범죄에 관하여 국제적인 판례와 학설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거나 논의된 개념은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현저한 역사 인식의 차이 및 그와 관련된 대내외 정책을 둘러싼 견해의 대립과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 범행이 위와 같은 동북아시아 특유의 정치적 상황과 그에 관련된 청구국의 대내외 정책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인지 여부가 정치적 범죄인지 여부를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요소 중의 하나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2) 판단요소 간의 유기적 고찰의 필요성
이 사건 인도심사청구 범행 대상은 야스쿠니 신사라는 종교법인 소유의 물건으로서, 그에 대한 방화로 말미암아 국가적 법익에 대한 직접적 침해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단순히 피상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범죄인이 왜 야스쿠니 신사를 범행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그 범행 동기나 목적을 범행 대상의 성격과 함께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범행 대상의 상징적 의미, 범행 목적과 범행 사이의 유기적 관련성 역시 정치적 범죄를 판단함에 있어 고려할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범죄인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한국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로 중국에 끌려와 고초를 당했다고 하면서 이 사건 범행 8일 전에 한일정상회담에서 청구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겠다고 하여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되었으며, 범행 대상을 야스쿠니 신사로 정한 이유는 위 신사가 14명의 A급 전범들을 비롯하여 침략전쟁에 참여하여 양민을 학살한 일본군을 신으로 모신 곳으로서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고난의 근원지라 생각하고 수년간 국제적인 항의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청구국 정부 각료가 계속하여 참배하고 있으며,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책과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가 수십 년간 1,000회를 초과하여 개최되었지만, 청구국 정부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기에 야스쿠니 신사에 표지를 남김으로써 정치적 신념을 알리고 군국주의에 경고하며 청구국 정부가 입장을 변경하길 원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이와 같은 진술은 관련 사건인 범죄인의 주한 일본대사관 현존건조물방화미수 사건 기록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 후 인터넷에 올린 글에 ‘일본군국공포주의에 대한 죽음의 제재를 개시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천몇백만 명의 일본군 칼에 찔려 숨진 동포들이여, 당신들을 위한 복수를 해냈단다’라고 기재하였다.
범죄인이 청구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기간 중 알고 지낸 청구외 5 역시, 범죄인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범죄인이 ‘외할머니가 조선의 종군위안부로 중국에 끌려갔다’고 하였고, 후쿠시마에 도착했을 때부터 범죄인이 ‘정부가 천황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전쟁을 인정하는 일이 되는 그 신사에 정부가 참배하는 일과 종군위안부에게 청구국 정부가 사과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3) 구체적 검토
가) 일본군위안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배경
그렇다면 이 사건 범행 대상과 동기 및 목적이 갖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군위안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배경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1) 일본군위안부에 관하여
(가) 일본군위안부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
일본군위안부는 1930년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 병사를 위하여 강제로 성행위를 종용당함으로써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들을 의미한다.
일본군은 1932년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 병사에 의해 강간사건이 빈번하면서 현지인들의 반발과 성병 등의 문제로 이어지자 그 방지책으로서 이른바 ‘위안소’를 최초로 설치하여 위안부를 두기 시작하였고, 1937. 7.부터 중일전쟁으로 병력을 중국으로 다수 송출하면서 점령지에 군 위안소를 설치했는데, 1937. 12. 남경대학살 이후 그 수가 증가되었다. 일본군은 1941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중 동남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점령지역에서도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 일본군위안부의 수는 8만 명에서 10만 명 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중 80%는 조선 여성이었고, 나머지는 필리핀, 중국, 대만, 네덜란드 등지의 여성들이다.
(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제기
1990. 11.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발족되고, 1991. 8.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공개 기자회견을 통하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청구국 정부는 그에 관한 책임을 부인하면서, 일본군위안부를 민간 접객업자가 군을 따라다니며 데리고 다닌 ‘매춘부’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다.
(다)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
 
1992.  1.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 징집에 직접 관여한 관계 공문서가 발견되고, 피해자가 출현함에 따라, 청구국 정부는 진상 조사에 착수하였다. 1993. 8. 4. 청구국 정부는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일본군위안부의 이송에 관하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였으며, 일본군위안부의 모집에 관하여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하였으나, 이 경우에도 감언이나,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다수 있고,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으며,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며, 문제의 본질이 중대한 인권침해였음을 승인하며 사죄하는 내용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라) 아시아여성발전기금 조성을 둘러싼 논란
그 후 청구국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한일협정’이라 한다)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면서, 1994. 8. 31. 인도적으로 민간 차원에서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의 조성을 모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한국, 대만 등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정당한 배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추진되는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의 활동에 대해 반대 견해를 밝혔다.
(마) 대한민국과 청구국 간의 견해 차이
대한민국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 8. 26. 결정을 통해, 한일협정은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과 같이 청구국 정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청구국 정부는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를 통한 사과, 한일협정을 통한 법적 문제의 해결,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의 활동 등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관련 문제가 완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일본군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인하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1991년부터 청구국 사법부에 청구국을 상대로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대부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청구권 소멸 등을 이유로 패소하였으나, 1998. 4. 27. 청구국의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입법부작위 책임을 인정하여 손해배상을 명하면서, 그 피해를 ‘철저한 여성차별·민족차별 사상의 표현이며, 여성의 인격의 존엄을 근저에서부터 침해하고, 민족의 긍지를 짓밟는 것이며 청구국 헌법 제13조에 명기된 핵심 가치에 관련된 기본적 인권의 침해’라고 판단하였다.
한편 우리 헌법재판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청구국에 대하여 가지는 배상청구권이 한일협정으로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양국 간 해석상 분쟁을 위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작위가 위 피해자들의 중대한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어 위헌이라고 판단하였다( 헌법재판소 2011. 8. 30. 선고 2006헌마788 전원재판부 결정).
(바) 국제기구의 입장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지속적인 연구활동을 수행하여 왔는데, 인권위원회 결의문 1994/45에 따라 쿠마라스와미(Radhica Coomaraswamy) 특별보고담당관이 1996. 1. 4.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설치한 것이 국제법 위반으로서 청구국 정부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 보관 중인 관련 자료의 공개, 서면을 통한 공식사죄, 교과서 개정, 책임자 처벌 등을 권고하는 6개 항의 권고안을 제시하였으며, 1996. 4. 19. 제52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위 보고서의 채택결의가 있었다.
또한 1998. 8. 12.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는 맥두걸(Gay J. McDougall) 특별보고관의 보고서가 채택되었는데, 위 보고서에서는, ‘강간센터(rape center, rape camp)’라 할 수 있는 위안소에서 강제로 성적 노예 상태로 빠뜨려진 일본군위안부에 대하여 청구국 정부의 법적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위안소의 설치에 책임이 있는 자들의 처벌문제와 신속하게 청구국 정부의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한편 유엔인권이사회는 2008. 6. 12.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각국의 권고와 질의를 담은 실무그룹보고서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으며, 유엔 B규약 인권위원회는 2008. 10. 30. 제네바에서 청구국의 인권과 관련된 심사보고서를 발표하고, 청구국 정부에 대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
(사) 국제사회의 태도
미국 하원은 2007. 7. 30. 청구국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매춘 제도인 일본군위안부는 집단 강간과 강제유산, 수치심, 신체 절단과 사망, 자살까지 가져온 성적 폭행 등을 유발했으며 잔인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범죄 중 하나라는 점, 청구국에 새로 도입된 교과서는 일본군위안부의 비극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청구국의 전쟁범죄를 축소하고 있다는 점, 청구국 관리들이 최근 들어 공적·사적으로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를 부인하거나 희석하려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면서, ① 청구국 정부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국가들과 태평양 제도를 식민지화하거나 전시에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적 노예로 만든 사실을 공식 인정하면서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② 청구국 정부는 일본군들이 일본군위안부를 성적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 한 사실이 없다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하여야 하며, ③ 청구국 정부는 국제사회가 제시한 권고에 따라 현 세대와 미래 세대를 대상으로 끔찍한 범죄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는 등의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 후 2007. 11. 8. 네덜란드 하원, 2007. 11. 28. 캐나다 연방의회 하원, 2007. 12. 13. 유럽의회가 차례로 청구국 정부에 대하여 20만 명 이상의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동원해 저지른 만행에 관한 공식사과와 역사적·법적 책임의 인정, 피해자 보상,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현재와 미래의 세대들에게 교육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2) 야스쿠니 신사에 관하여
(가)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 막부(幕府) 군과의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싸우다 숨진 관군 측 전몰자를 위령(慰靈)하고 높이 떠받드는(顯彰) 신도(神道)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의 지시로 건립된 도쿄 초혼사(東京招魂社)가 그 전신이다. 원래 신사는 청구국의 민속종교인 신도의 신들을 모시는 시설인데,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의 정신적 기축으로서 전통적 신사신도와 황실신도를 통일하여 천황 중심의 국가신도를 만들었고, 야스쿠니 신사는 그에 따라 만들어진 신사 중 하나이다.
(나) 도쿄 초혼사는 1879년 천황에 의해 ‘국가를 편안하게 한다(靖國)’는 뜻의 야스쿠니 신사로 명칭이 바뀌었고,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 즉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천황·황족을 제사지내는 신사인 관폐사 다음으로 격이 높은 신사로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를 제신(祭神)으로 하는 신사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특히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라는 특별한 지위에 있었고, 일반 신사가 내무성 담당이었는 데 반해 야스쿠니 신사는 1887년부터 육·해군성이 담당한 신사로서 전쟁과 밀접한 시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다) 야스쿠니 신사는 초기에는 내란에서 전사한 관군을 제신으로서 합사(合祀)하였는데, 그 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대외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군속을 중심으로 합사하면서 국민통합과 전쟁수행을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대한민국과 대만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그에 저항한 사람들을 진압·토벌하면서 전사한 군인들도 합사하는 등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한 군의 종교시설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시대 이후 천황이나 황족을 제외한 일반 국민을 제신으로 모신 유일한 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 주며,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이전의 죄는 전부 말소된 채 제신으로 합사되었는데,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일본군 병사들에게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유족들에게는 명예와 위로를 주며, 일반 국민에게도 제국의 신민으로서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하게 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신도의 정신적 지주와 군국주의의 상징적 역할을 하였고, 또 이러한 국가 신도에 대하여 사실상 국교적인 지위가 수여되었다.
(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에 있어서 청구국 정부 후생성이 도도부현(都道府縣)과 협력하여 전몰자들의 ‘제신명표(祭神名票)’나 ‘전몰자신분 등 조사표’를 만든 다음 야스쿠니 신사로 보내고, 야스쿠니 신사는 그것에 근거하여 합사하였다.
 
1978.  10. 17.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이른바 A급 전범 14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는데, 여기서 A급 전범이란, 청구국의 대외침략전쟁을 주도한 범행을 저질러, 연합국이 청구국의 전쟁범죄를 재판하기 위해 설치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조례 제5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범죄, 즉 선전포고를 하거나 선전포고 없는 침략전쟁, 국제법·조약·협정·선약에 위배되는 전쟁 계획·준비·개시·수행 또는 이상의 행위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계획이나 공동모의’에 해당하는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그 외에도 일본 군인이나 군속으로 청구국의 대외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사망한 한국인 2만 1천여 명과 대만인 2만 8천여 명이 합사되어 있고, 현재 총 246만여 명이 합사되어 있는데, 군인·군속·준군속 등의 전몰자만 합사 대상으로 하고 있고 공습으로 사망한 일반 시민 등은 합사 대상으로 하지 않고 있으며, 합사자 중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관련된 전사자 수가 245만여 명으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청구국을 통치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는 1945년 12월 ‘국가신도와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 지원, 보전, 감독 및 선전의 폐지에 관한 건’[이른바 신도지령(神道指令)]을 발표함으로써 정부 등의 공적 기관이 신도를 원조하는 것과 공무원이 공적 자격으로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국가신도의 폐지와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시했는데, 1947년 시행된 청구국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은 메이지유신 이래 신도가 국가와 밀착되어 전쟁의 수행에 이용되는 등 여러 가지 폐해가 생긴 데 대하여 반성하고, 군국주의가 다시 도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바) 1946. 2. 2.에는 신사와 관련된 모든 법령이 폐지되고 국가신도는 제도상으로 소멸하였고, 같은 날 시행된 종교법인령에 의하여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적 성격을 상실하고 종교법인으로 그 지위가 바뀌었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는 제신, 의례(儀禮), 유족과의 관계 등에서 종전 전의 지위가 여전히 유지되었고, 다른 신사들과는 달리 신설된 신사본청(神社本廳)에 소속되지도 않았으며, 국가적인 전몰자 추도시설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종전 전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함양하는 교육시설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사) 동서냉전이 격화되고,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점령통치가 종결되어 신도와 신사에 대한 엄격한 통제정책이 점차 완화됨에 따라, 일본유족 후생연맹(그 후 일본 유족회로 조직 변경)은 1952년 전범자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요구하는 방침을 정하고, 야스쿠니 신사의 위령 행사를 국비로 지원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그 후 일본 유족회를 비롯하여 신사본청 및 기타 우익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민주당은 1969년부터 야스쿠니 신사와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수차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종교계, 진보적 단체가 야스쿠니 신사는 단순한 신사가 아니라 과거 국가신도적 천황제 및 군국주의의 핵심부에서 기능했던 만큼 그 국영화에 대해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이유 또는 정교분리 원칙을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위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아) 한편 1975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가 개인 자격이라고 하면서 종전 기념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총리 자격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여 아시아 각국 등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한동안 중지되었던 총리의 참배는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의 참배에 이어 2001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공식 참배하여 다시 계속되는 등 현재까지 총리를 비롯한 정부각료, 국회의원, 도지사 등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왔다.
(자) 야스쿠니 신사와 부속시설인 유슈칸(遊就館) 전쟁박물관에는 근대 일본 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 에키지의 동상, 제로 전투기, 탱크, 기관총, 전함의 특대형 포탄 등 각종 병기, 자살공격을 감행한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과 유품, 군마와 군용 비둘기, 군견의 위령상 및 위령탑 등 근대 국가 성립 이후 청구국이 치른 전쟁에 관한 각종 전쟁 유물과 전몰자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각 전쟁에 대한 필연성에 관한 설명과 해석이 기술되어 있다.
(차) 청구국 정부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싸고 대한민국과 중국 등 청구국의 침략을 받았던 주변국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시설 또는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하면서 그 참배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있고, 위 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전몰자의 유족 일부는 위 신사를 상대로 그 합사를 취소하는 소송까지 제기하였다. 청구국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가 종전 후에는 종교법인으로서 국민국가 일반의 공적 추도시설의 기능이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으나, 그 정부각료나 정치인들은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 등으로 앞서 본 바와 같이 참배를 계속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청구국 내에서도 찬반 의견 대립이 있다.
나) 범행 동기와 목적의 성격
앞에서 살펴본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 및 내력과 범죄인의 가족력, 이 사건 범행을 전후한 정치상황, 범죄인이 이 사건 범행 직후 대한민국으로 와서 외할머니, 외증조할아버지의 연고지를 찾아다닌 정황, 범죄인이 주한 일본대사관 현존건조물방화미수 사건에서 한 진술과 이 법정에서 한 진술의 내용 및 일관성에다가, 범죄인의 이 사건 범행은 개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구국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정책 변화를 촉구하고 그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국내외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는 점,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 일시를 정함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에 부합하도록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 후에 있었던 주한 일본대사관 현존건조물방화미수 범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의미 있는 일자를 선택한 점, 범죄인은 이 사건 범행의 준비도구 및 ‘사죄’라고 적힌 셔츠를 입은 자신의 모습과 범행의 실행 과정을 촬영하였고, 청구국의 수사기관에 의하여 실체가 밝혀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범행 사실과 그 목적을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외부에 널리 알리려고 하였던 점, 범죄인은 청구국에서의 이 사건 범행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청구국의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정책에 항의하는 일련의 행동을 하였는데, 이는 곧 동일한 범행 동기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고, 범죄인의 인식으로는 일본대사관이라는 공적인 기관과 야스쿠니 신사를 동일한 범주에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점, 청구국 내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등의 문제와 정부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싸고 정치적 의견 대립이 있는 점, 유엔 등 국제기구와 미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도 청구국 정부에 대하여 일본군위안부에 대하여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등의 취지를 담은 결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범행은 범죄인이 개인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구국이 과거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침략전쟁을 일으켜 그 과정에서 주변 각국에 일본군위안부나 대량 학살 등 여러 가지 피해를 주고도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통하여 전범이나 과거 군국주의 체제를 미화하려는 태도에 분노하여 저지른 것으로서, 그 범행 목적은 범죄인 자신의 정치적 신념 및 과거의 역사적 사실 인식과 반대의 입장에 있는 청구국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정치적 범죄에서 말하는 정치적인 목적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다) 범행 대상의 성격 및 범행과 목적 사이의 관계
다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범한 범죄라고 하여 모두 정치적 범죄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주관적·객관적 평가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형량하여 일반범죄로서의 성격과 정치적 성격 중 어느 것이 더 주된 것인지를 판단하여 결정하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사건 범행 대상의 성격을 살펴보면, 야스쿠니 신사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의 지위와 역할, 현재도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청구국 내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의 관리하에 두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던 점, 이러한 야스쿠니 신사에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청구국 정부각료 등 정치인들이 계속하여 참배해 왔던 점 및 지금까지의 정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야스쿠니 신사가 법률상으로는 사적인 종교시설이라고 할 것이나 사실상 국가시설에 상응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범죄인 역시 야스쿠니 신사를 단순한 사적 종교시설이 아니라 과거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치질서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이 사건 범행을 실행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대한민국과 중국 등 청구국의 주변국들도 청구국 정부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마다 강하게 항의하며 반발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야스쿠니 신사가 국가시설에 상응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는 범죄인 개인의 독단적인 견해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인정된다.
다음으로 범행과 목적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본다. 지금까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1,000회 넘게 청구국 정부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있었으나 청구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되었다는 취지의 범죄인의 진술과 실제로 이 사건 범행 후 범죄인의 동기와 목적이 언론 등을 통하여 널리 퍼지게 되고 청구국을 비롯한 주변 각국의 관심의 초점이 됨에 따라 과거에 청구국의 침략을 받았던 주변국이 청구국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그와 관련된 정책 및 우경화 추세에 대하여 공분을 느끼고 있음을 청구국 정부와 국민이 인식하게 된 점 및 앞서 본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과 유래에 비추어 볼 때, 범죄인이 이 사건 방화 대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하였던 정치적 목적을 상당히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사건 범행은 그 정치적 목적과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라) 범행의 성격과 의도된 목적과의 균형
이 사건 범행은 우리 형법 제167조 제1항의 일반물건에의 방화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공공의 위험이 발생되어야 처벌할 수 있는 구체적 위험범에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범행 대상인 신문이 건조물이 아닌 일반물건으로서 방화 당시는 인적이 드문 새벽녘이었고 야스쿠니 신사는 보안 경비가 삼엄하여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즉시 진화될 수 있는 인적·물적 설비가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이 사건 방화 직후 바로 야스쿠니 신사 경비원에 의하여 즉시 발견되어 바로 소화되기에 이른 점, 이 사건 방화로 인한 피해는 물적인 피해뿐이고 그 피해 또한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점, 비록 이 사건 신문이 전소하여 주위 건조물에 연소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신문의 규모에 비추어 실제로 이 사건 신문이 전소하기에 걸릴 시간은 적지 않으리라 보이고 그 후 주위 건조물에 연소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앞서 본 보안 경계의 정도에 비추어 그 전에 화재가 진압될 가능성이 큰 점, 청구국 수사기관도 수사 초기에는 이 사건 범행을 기물손괴 피의사건으로 의율하기도 했던 점, 이 사건 신문과 중앙문 원기둥 지주의 크기 및 규모와 실제 불에 탄 면적, 범행 당시 이번에는 흔적만 남기기로 하겠다는 범죄인의 의도, 이 사건 신문과 주위 건조물 사이의 거리 등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이 사건 방화로 일부 재산 피해가 생겼고 주위 건조물에의 연소 가능성 및 그로 말미암은 공공의 위험이 발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재산 피해, 연소 가능성 및 공공의 위험의 정도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사건 범행을 불특정 다수인의 생명·신체를 침해·위협하거나 이에 대한 위험을 야기한 범죄로서 범죄인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과의 균형을 상실한 잔학한 행위로 평가할 수는 없다.
마)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취지와의 관계
앞서 본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취지와 관련하여 이 사건을 살펴본다. 대한민국(범죄인의 국적국인 중국도 마찬가지 입장이다)과 청구국 사이에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정책과 정부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인식 및 그에 관한 대응 등에서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의 대립이 있었고, 청구국 내에서도 정치적 견해의 대립이 존재하였다.
범죄인의 이 사건 범행 동기와 목적에 비추어 보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청구국의 정책에 대한 범죄인의 견해는 대한민국의 헌법이념과 유엔 등의 국제기구나 대다수 문명국가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범죄인을 청구국에 인도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질서와 헌법이념 나아가 대다수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되어 앞에서 본 정치범 불인도 원칙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더욱이 청구국 내에서도 앞에서와 같은 견해 차이와 견해의 대립이 있는 이상 정치범을 인도하는 것은 청구국 내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어 국제관계상 바람직하지 않다.
바) 소결론
이상과 같이 ① 범죄인의 범행 동기가 청구국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인식 및 그와 관련된 정책에 대한 분노에 기인한 것으로서, 범죄인에게 이 사건 범행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득하려는 동기를 찾아볼 수 없으며, ② 범행 목적이 범죄인 자신의 정치적 신념 및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견해와 반대의 입장에 있는 청구국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고, 범죄인의 정치적 신념 및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견해가 범죄인 개인의 독단적인 견해라고 할 수 없으며, 대한민국과 범죄자의 국적국인 중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의를 얻고 있는 견해와 일치하고, ③ 이 사건 범행의 대상인 야스쿠니 신사가 법률상 종교단체의 재산이기는 하나, 위 신사에 과거 청구국의 대외침략전쟁을 주도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고,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청구국 정부각료들이나 정치인들이 참배를 계속하고 있는 등 국가시설에 상응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④ 이 사건 범행은 정치적인 대의를 위하여 행해진 것으로서, 범행 대상인 야스쿠니 신사와 직접적인 범행 동기가 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의미 및 배경에다가 이 사건 범행 후 청구국을 비롯한 각 국가에서 범죄인의 주장에 관심을 두게 되고 논의가 촉발된 정황에 비추어, 범죄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 사건 범행이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이므로 범행과 정치적 목적 사이에 유기적 관련성이 인정되고, ⑤ 이 사건 범행의 법적 성격은 일반물건에의 방화이나, 범행 동기와 시간대, 범행 대상의 규모와 비교한 소손 면적의 정도, 연소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실제적으로는 오히려 손괴에 가까운 것으로서 방화로 말미암은 공공의 위험성의 정도가 그리 크다고 볼 수 없으며, ⑥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전혀 없고 물적 피해도 크다고 할 수 없어 이를 중대하고 심각하며 잔학한 반인륜적 범죄로 단정하기 어려우므로 이 사건 범행으로 야기된 위험이 목적과의 균형을 상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사정들과 범죄인 불인도 원칙의 취지, 범죄인 인도 청구국인 일본국과 피청구국인 대한민국, 나아가 범죄인의 국적국인 중국 간의 역사적 배경,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및 입장의 대립과 같은 정치적 상황,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대다수 문명국가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는 청구국의 일본군위안부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에 항의하고 그와 관련된 대내외 정책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행해진 일반물건에의 방화 범죄로서 일반범죄로서의 성격보다 그 정치적 성격이 더 주된 상태에 있는 상대적 정치범죄라 할 수 있고, 이는 이 사건 조약 제3조 (다)목 본문 소정의 ‘정치적 범죄’에 해당한다.
 
4.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인도 대상 범죄는 정치적 범죄이고, 달리 범죄인을 인도하여야 할 예외사유도 존재하지 아니하므로, 나머지 쟁점들에 관하여는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이 사건 조약 제3조 (다)목에 의하여 범죄인을 청구국에 인도하는 것을 허가하지 아니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판사 황한식(재판장) 권순민 이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