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판례정보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화면내검색 공유하기 즐겨찾기 저장 인쇄

손해배상(기)

[서울중앙지법 2021. 1. 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 : 확정]

【판시사항】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甲 등이 일본국을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甲 등에 대한 일련의 행위는 일본제국에 의하여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일본국은 일본제국의 불법행위로 甲 등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甲 등이 일본국을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구한 사안이다.
국가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원칙이라는 국가면제의 국제관습법에 의하더라도 국가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재판권이 면제되므로 주권을 가진 국가라면 예외 없이 타국의 재판권 행사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볼 수는 없고, 일정한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되어야 할 것인바, 甲 등에 대한 일련의 행위는 일본제국에 의하여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며, 당시 일본제국에 의하여 불법점령 중이었던 한반도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 甲 등에 대하여 자행된 것으로서, 비록 그와 같은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권이 있다고 봄이 타당한데, 일본제국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군인들의 사기 진작 및 민원 발생의 저감, 군인들에 대한 효율적 통솔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른바 ‘위안부’를 관리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고, 이를 제도화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군과 국가기관에서 조직적으로 계획을 세워 인력을 동원, 확보하여 ‘위안소’를 운영하였으며, 당시 10대 초중반에서 20세에 불과한 甲 등은 ‘위안부’로 동원된 이후 일본제국의 조직적이고 직간접적인 통제하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군인들의 성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의 국제조약, 일반적인 국제관습법과 일본제국의 국내법, 전후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헌장 등을 종합하면, 위와 같은 행위는 당시 일본제국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그로 인하여 甲 등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일본제국의 후신으로서 동일성이 인정되는 일본국은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甲 등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나마 배상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甲 등의 일본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및 ‘2015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위 협정 등에 의하여 甲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한 사례이다.

【참조조문】

헌법 제6조 제1항, 제27조 제1항, 민법 제750조, 제751조,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1조, 제2조


【전문】

【원 고】

원고 1 외 11인(소송대리인 변호사 김강원)

【피 고】

일본국

【변론종결】

2020. 10. 30.

【주 문】

 
1.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을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3.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주문과 같다.

【이 유】

1. 기초 사실
 
가.  일본제국의 한반도 침탈, 조선인 강제동원 및 전쟁의 종결
1) 일본제국은 1910. 8. 22. 대한제국과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제국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그로 인하여 동아시아 지역이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제국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선은 동아시아를 넘어 남양군도 및 남태평양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2) 일본제국은 이러한 전쟁으로 인하여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37. 8.경 ‘국민정신총동원 실시요강’을 마련하였으며, 1938. 4. 1.「국가총동원법」을, 1939. 7. 8.「국민징용령」을 제정ㆍ공포하였고, 1941. 11.경에는「국민근로보국협력령」에 의하여 14세 이상 25세 미만 미혼여성들에게 1년 중 30일 이내 국민근로보국대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는 일본제국이 점령 중이던 한반도 내에서 남녀를 포괄하고 보도, 의료, 근로 등 여러 분야에서 ‘정신대’를 동원하여 왔는데 1944. 8. 23. 일왕(日王)은「여자정신근로령」을 칙령으로 공포하여 위 ‘정신대’를 공식화하였다. 1939. 9.부터는 ‘모집형식’에 의하여, 1942. 2.부터는 ‘관(官) 알선방식’에 의하여, 1944. 9.경부터는 ‘징용령 방식’에 의하여 정신대 등 조선인 동원이 이루어졌다.
3) 일본제국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1945. 8. 6. 히로시마에, 같은 달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 같은 달 15일 낮 12시 쇼와 히로히토(昭和裕仁) 일왕(日王)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나.  ‘위안부’ 동원 과정
1) 일본제국의 위안소 설치 및 ‘위안부’의 동원
가) 위안소 설치
‘위안소’는 1932년 상해사변 시 일본군 병사에 의하여 강간사건이 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현지인들의 반발과 성병 등의 문제로 이어지자 그 방지책으로 일본해군이 설치한 것이 최초였고, 중일전쟁이 전면적으로 개시된 후 일본제국은 전선의 확대와 더불어 군인들의 관리를 위하여 ‘위안소’를 설치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군인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서 이탈하려는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불만을 유화시키며, 특히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식민지 여성을 ‘위안부’로 둠으로써 군의 기밀이 새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7년경부터 일본군이 점령 중이었던 중국 등 전쟁지역에 위안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1941년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는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지역까지 군위안소가 설치되었다.
일본제국 육군은 1937. 9. 29. 육달(陸達) 제48호로 물품판매소 규정인「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을 개정하여 군 영내 주보(전쟁 중 군 영지 내에 군인, 군속 등에게 물품을 판매하는 매점)에 위안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1943. 7. 18.「영외시설규정」에서 중대 이상의 주둔지로서 군인ㆍ군속 전용의 특수위안소를 군 영외에 설치할 수 있되 위탁경영하는 것으로 정함으로써, 군 영내ㆍ외에 위안소를 설치할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1938. 5. 펴낸「전시복무제요」에서는 “성병에 대한 적극적 예방법을 강구하고 위안부 위생시설을 완비함과 동시에, 군이 지정한 이외의 매춘부 및 지역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기도 하였다.
나) ‘위안부’ 동원
일본제국은 자국 및 점령지의 여러 국가들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장지에 설치된 위안소에 ‘위안부’들을 동원하였는데, ① 여성들을 폭행, 협박, 납치하여 강제로 동원하는 방식, ② 지역 유지, 공무원, 학교 등을 통하여 모집하는 방식, ③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라고 기망하여 모집하는 방식, ④ 모집업자들에게 위탁하는 방식, ⑤ 근로정신대, 공출 제도를 통한 동원방식 등을 이용하였다.
2) ‘위안부’ 수송 및 위안소 운영 과정에서의 일본제국의 역할
일본군 사령부는 모집된 ‘위안부’들을 한반도 밖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원활한 수송을 위하여 ‘위안부’들에게 무료 도항증, 국외 이동을 위한 신분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등 민간업자들의 ‘위안부’ 수송에 편의를 제공하거나, 일본군인이나 일본경찰들이 직접 ‘위안부’들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업무를 맡아 이행하였다. 위안소의 관리는 일본군이 직접 하거나 일본제국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민간업자들이 하였다. 민간업자에게 위탁할 경우 일본군은 민간업자의 개업 여부, 설비 마련, 개업 시간, 이용 요금, 이용자의 피임기구 사용 의무 등을 정하는 방식으로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에 관여하였다. ‘위안부’들의 건강관리(다만 이는 성병의 예방, 진단과 치료 등에만 국한되었다)는 주로 일본군 군의(軍醫)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위안부’가 도주하는 경우 일본군이 직접 추격하여 도주한 ‘위안부’를 다시 위안소로 끌고 오거나 사살하기도 하였다.
3) 원고 등의 개인별 ‘위안부’ 동원 과정 및 위안소 생활
가) 원고 1은 1923년 경북 성주군 (지명 1 생략)에서 출생하여 19세에 대구로 이사하였는데, 1941. 10.경 친구의 집에 40세가량의 일본인과 조선인 남자들이 찾아와 원고 1에게 “서울로 취직시켜 주겠다.”라고 권유하였다. 원고 1은 서울에서 취직하여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벗어나 자립하고자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원고 1이 서울에 도착한 뒤로 조선인 남자는 취직할 곳이 서울이 아니라면서 서울역에서 위 원고를 기차에 태웠고, 위 원고는 중국 삼강성(三江省)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원고 1은 위안소에서 27명 정도의 한국인 ‘위안부’들과 지내면서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평일에는 5~6명, 주말과 공휴일에는 15~16명의 일본군에 의하여 성행위를 강요당하였다.
나) 원고 2는 1926년 강원도 정선군에서 출생하여 철원으로 이주한 후 ‘○○○○’로 창씨개명하였는데, 1942년 심부름을 가던 중 길에서 군인 복장을 한 남자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가 차에 태워졌다. 원고 2는 그 길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명 2 생략)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원고 2는 위안소에서 주 1회 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면서 많을 때는 하루에 40여 명의 일본군인들로부터 성행위를 강요당하는 ‘위안부’ 생활을 하였다. 위안소에서는 군인들로부터 종종 폭행을 당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귀의 고막이 파열되는 상해를 입기도 하였다.
다) 원고 3은 1928년 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일본군이 “처녀 공출을 한다.”, “보국대를 뽑는다.”라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 친구 집으로 피해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인 순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원고 3의 이름이 기재된 징용문서를 전해 주고 갔고, “베 짜는 곳으로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트럭 뒷좌석에 실려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원고 3은 ‘△△△’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후 중국 심양으로 이동하였다가 중국 장춘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정기적으로 성병예방주사를 맞으면서 하루에 7~8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고 3이 있던 위안소는 일본군의가 정기적으로 산부인과 검진을 하였고, 일본군 간부의 부인이라는 일본인 여자가 위안소를 전체적으로 관리하였다.
원고 3은 이곳에서 군인들에게 머리카락이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로 정수리 부분을 맞는 등 갖은 폭행을 당하였다. 원고 3은 당시 10대 중반으로 어리고 몸이 약하여 자주 열이 나고 아팠는데 일본군인들은 원고 3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면 안 된다며 산에 유기하고 불태워 죽이려고도 하였다.
라) 원고 4는 1927년 부산에서 출생하였는데 1942. 7.경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모르는 남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원고 4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명 3 생략)에 도착한 이후 쇠창살이 설치된 수용소에 수용되어 이름을 ‘□□□’로 바꾸고 일본군이 사용하던 비행장을 확대하는 공사에 동원되어 일을 하였는데, 공사장에는 인부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여러 차례 일본군인들으로부터 강간과 폭행을 당하였다. 얼마 후 일본군인들이 원고 4를 인근의 위안소로 보냈고 원고 4는 위안소에 수용되어 하루에 30~40명에 이르는 일본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고 4가 일본군인들의 성적인 요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들로부터 흉기를 이용한 심각한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원고 4는 매독이라는 성병을 앓게 되었고 606호 주사 를 정기적으로 맞아도 잘 낫지 않자 수은을 사용하는 극단적인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 치료 이후로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원고 4는 위안소에서 탈출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위안소로 다시 끌려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귀를 얻어맞아 귓병을 앓게 되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여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 원고 5는 1924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친구가 “중국 바느질 공장에 들어갈래?”라고 제안하자 당시 빈한한 가사를 돕기 위하여 친구와 함께 중국에 있는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안부’ 모집책을 따라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원고 5를 포함한 조선여성들이 탄 기차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위 원고는 군인들의 인솔에 따라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지명 4 생략) 인근의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주 1회 일본군의로부터 산부인과 검진을 받고 606호 주사를 맞으면서 하루에도 15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하여야 했고, 위안소를 관리하는 관리인들과 군인들로부터 수시로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간이 날 때면 군인들의 의복을 빨고 바느질하는 등의 일을 하였고, 일본군 부상병들을 위문하기 위한 노래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원고 5는 위안소에서 아프거나 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위안소를 탈출하는 ‘위안부’들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바) 원고 6은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20세 때 “공장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위안부’ 모집책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지명 5 생략)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의 위안소에 수용되었다. 위안소의 관리인은 조선인이었으나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본군인이었다. 일본군인들은 위안소 관리인으로부터 ‘표’를 사서 입장하였고, 그 표를 ‘위안부’에게 주면 ‘위안부’들이 이를 관리인에게 가져가서 계산을 하는 방식이었다. 주 1회 일본군의로부터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고, 군인들을 적게 상대하거나 병이 나서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면 관리인 등으로부터 체벌을 받았다.
‘위안부’ 생활 중 원고 6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일본군 장교가 빚을 갚아줄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지명 5 생략)의 위안소를 나오게 되었다. 원고 6은 출산 이후에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중국인에게 맡기게 되었고 또다시 팔려갈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어쩔 수 없이 ◇◇◇ 위안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임신을 하게 되어 위안소를 나오게 되었다. 원고 6은 위안소에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거나 도망한 ‘위안부’들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사) 원고 7은 1929년 아산시에서 출생하여 1943. 11.경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남편이 혼인 다음 날 강제징용을 당하였고, 원고 7도 그로부터 2~3일 후에 일본순사에 의하여 강제로 기차를 타게 되었다.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끼(下?市)로 이동한 후 ‘☆☆☆’ 부대에 도착하여 의복으로 군복을 지급받았고, 이후 하루에도 20~30명에 이르는 일본군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였다. 낮에는 방공호로 도망하였다가 밤에는 위안소로 돌아오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군함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위안부’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위안소에서는 옷이 칼로 찢겨나가거나 흉기로 폭행을 당하였고, 그로 인한 상처가 영구적으로 남게 되었다.
아) 원고 8은 1930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1945. 2.경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라는 말에 전교생의 축하를 받으며 일본으로 떠났다. ▽▽▽ 비행기 군수 물자 공장으로 동원되어 그곳에 수용되었으며, 이때 일본군인들의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 원고 9는 1926년 전북 임실군 (지명 6 생략)에서 출생하여 1943년경 일본군들이 소녀들을 잡아들인다는 소문에 지인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동네 공무원이 “어디(광목 공장)로 가면 밥도 잘 먹고 한다.”라고 말하면서 끌고 가자 억지로 따라나서게 되었고, 기차와 배를 갈아타면서 ‘야스시마’ 남양군도의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일본군인들이 위안소에 찾아왔고, 원고 9가 울면 그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차) 망 소외 1은 1929년 안동시에서 출생하였는데 1943년경 일본순사들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가 일본 북해도로 가게 되었다. 망 소외 1은 그곳에서 ‘◎◎◎’라고 이름을 바꾸고 공장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갔으나 군대 영내에서 100여 명의 여성들이 단체로 생활하면서 군인들의 밥과 빨래 등 허드렛일을 하고 수차례 성폭행을 당하였으며, 이를 피하면 군인들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하였고, 폭행으로 다리가 부러지는 상해를 입기도 하였다.
카) 원고 11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1944. 10.경 일본군인으로부터 취직 권유를 받았다. 원고 11이 이를 거절하였음에도 강제로 끌려가 중국 만주의 위안소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본군인들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타) 원고 12는 1922년 경남 남해군에서 출생하였는데 1938년경 사촌과 함께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던 중 일본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가 일본 나고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중국 만주로 보내져 만주에 있는 일본군 소대 앞 위안소에서 20여 명의 ‘위안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공휴일에는 여러 명의 일본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원고 12가 있던 위안소는 일본군 여군들이 관리하였고,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도주하는 경우 잡히면 총살을 당하였다.
파) 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원고 7, 원고 8, 원고 9, 원고 11, 원고 12 및 망 소외 1(이하에서는 ‘원고 등’이라고 칭한다)은 위안소라는 단체숙소에서 각자 하나의 방을 배정받았고, 하루에 한두 끼니 정도의 배식을 받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 일본군의들로부터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 등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다. 성병 등 산부인과 질환이 있을 경우에는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 외의 질병은 전혀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이질 등 전염병에 걸린 ‘위안부’들은 격리되거나 유기되었다.
식사는 매우 부실하여 풀을 뜯거나 콩깻묵을 섞어 밥을 해 먹었고, 군인들이 입다 낡은 군복 등을 세탁하여 입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군인들의 성적 욕구의 대상이 되었고 주말은 더 많은 군인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을 때에는 그들로부터 무참히 폭행을 당해 심각한 상해를 입기도 하였다.
위안소에는 관리인이 있어서 ‘위안부’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으며, ‘위안부’들이 아프거나 반항하여 일본군인들의 성적인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경우 ‘위안부’들을 폭행하기도 하였다. ‘위안부’들이 도주할 경우 일본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살상하거나 다시 위안소로 끌고 들어왔으며, 도주에 성공한 ‘위안부’가 있으면 남은 ‘위안부’들에 대한 감시가 더욱 엄격해졌다.
원고 등은 위안소 관리인 등으로부터 별다른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돈을 지급받았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을 정도의 소액이었다.
 
다.  종전 이후의 원고 등의 생활
1) 종전이 되자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위안소에 그대로 두고 퇴각하였다. 원고 등은 종전 여부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위안소 근처 지역에서 헤매다가 전투상황을 고스란히 겪거나, 맨몸으로 생계를 부지하기 위하여 갖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고 등은 대부분 곧바로 고향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 원고 등은 혼인을 하지 못하거나, 혼인을 하더라도 원만한 혼인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으며, 고향에 돌아온 경우에도 부모나 가족들이 이들을 부끄럽다고 여기곤 하여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과거를 떳떳하게 말할 수 없어 남편이나 자녀들에게도 ‘위안부’ 생활에 관한 과거에 대하여 함구하여 온 경우가 많았다. 혼인 후 남편에게 “왜 결혼 전에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라며 질책을 당한 원고도 있었다.
3) 원고 등은 육체적으로는 위안소에서 당한 상해나 질병, 성병의 후유증을 겪어 건강을 해쳤고, 육체적 고통 외에도 정신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었으며 정상적 범주의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대체로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라.  일본제국이 종전 무렵까지 가입한 국제협약 등
1)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Convention with Respect to the 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 이하 ‘헤이그 육전협약’이라고 한다)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제국은 1911. 12. 13. 위 협약을 비준하였다. 위 협약 제3조는 “부속서상의 의무를 위반한 교전당사자는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교전당사자는 개별전투원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한다(A belligerent party which violates the provisions of the said Regulations shall, if the case demands, be liable to pay compensation. It shall be responsible for all acts committed by persons forming part of its armed forces).”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부속서 제46조에는 “가족의 명예와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Family honour and rights, the lives of persons, and private property, as well as religious convictions and practice, must be respected).”라고 규정되어 있다.
2) 백인노예매매의 억제를 위한 국제조약
일본제국이 1925년 비준한 ‘백인노예매매의 억제를 위한 국제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uppression of the White Slave Traffic)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미성년의 여성 또는 소녀를 부도덕한 목적을 위하여 모집, 권유 또는 유괴한 사람은 그의 동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범죄를 구성하는 각각의 행위가 다른 국가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다고 하더라도 처벌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3)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 조약 및 노예협약
국제연맹은 1921. 9. 30.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uppression of the Traffic in Women and Children)을 채택하였는데, 일본제국은 위 조약을 1925년경 비준하였다(다만 이때 식민지인 한반도 지역, 대만 지역, 요동반도 이남 조차지에 대한 적용을 유보하였다). 위 조약에 의하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 산업의 목적으로 미성년(21세 이하) 여성을 설득, 유혹, 납치하는 어떤 행위도, 당사자의 동의가 있더라도, 범죄가 된다.
또한 국제연맹은 1926. 9. 25. ‘노예협약’(Slavery convention)을 채택하고, 1927. 3. 9. 이를 공표하였는데, 위 협약은 ‘노예’를 ‘소유권에 수반하여 일부 또는 모든 권한이 행사되는 자의 지위 또는 상태’라고 정의한 다음 노예 해방, 노예거래 금지, 강제근로 금지를 규정하고 있고, 이는 국제관습법으로 발전하였다.
4)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국제노동기구(ILO)는 1930년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ILO Convention 29)을 채택하였고, 일본제국은 1932. 11. 21. 위 협약을 비준하였다. 위 협약에 의하면 강제노동을 단기간 내에 폐지하고 폐지할 때까지 과도기라고 하더라도 여성은 전적으로 제외하여야 하며, 근로기간과 시간을 한정하고 상당한 보수 및 산업재해를 보상하며 건강한 조건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5) 일본제국의 구 형법
일본제국의 국내 및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당시 한반도에 적용된 형법(일본제국 법률 제45호, 1907년 제정, 이하 ‘피고의 구 형법’이라고 한다) 제226조에서는 ‘국외 이송 목적 약취ㆍ유인ㆍ매매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었다.
 
마.  피고의 성립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1946. 11. 3.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현행 피고가 성립되었다.
 
바.  종전 이후 대한민국과 피고 간의 전쟁 문제에 관한 합의 사항
1)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체결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국, 영국 등을 포함한 연합국과 피고는 1951. 9. 8.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화조약(이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라고 한다)을 체결하였는데, 위 조약 제4조 (a)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위 조약 제2조에 규정된 지역에 존재하는 피고 및 그 국민의 재산, 그리고 위 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을 상대로 한 청구권과 피고에 존재하는 위 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 소유의 재산, 그리고 위 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의 피고 및 피고의 국민들에 대한 청구권의 처리는 피고와 위 지역의 통치 당국 간의 특별 협정이 규정하는 바에 따른다.”라고 정하였다.
2) 대한민국과 피고 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약과 부속협정의 체결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된 후 대한민국 정부와 피고 정부 사이에 1965. 6. 22.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이라고 한다)이 체결되었는데, 청구권협정은 제1조에서 “피고가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라고 정하고, 제2조에서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 9. 8.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정하였다.
청구권협정은 1965. 8. 14. 대한민국 국회에서 비준 동의되고, 1965. 11. 12. 일본 중의원 및 1965. 12. 11. 일본 참의원에서 비준 동의된 후 그 무렵 양국에서 공포되었고, 양국이 1965. 12. 18.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3) 청구권협정 이후 대한민국의 조치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 이어서 보상대상이 되는 대일 민간청구권의 정확한 증거와 자료를 수집함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하여, 1971. 1. 19.「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하 ‘청구권신고법’이라고 한다)을 제정하였다. 청구권신고법에서 정한 신고대상은 ‘1947. 8. 15.부터 1965. 6. 22.까지 일본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이 1945. 8. 15. 이전에 피고 및 일본국민에 대하여 가졌던 청구권 중 피고에 의하여 군인ㆍ군속 또는 노무자로 소집 또는 징용되어 1945. 8. 15. 이전에 사망한 자’만으로 한정하였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신고대상이 되지 않았다.
 
사.  피고의 공식 담화
 
1993.  8. 4.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한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적이고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지(戰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한반도는 일본국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또 그런 마음을 일본이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에 관해서는 식견 있는 분들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자 한다. 우리들은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 덧붙여 본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고 또 국제적인 관심도 받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아.  대한민국과 피고의 추가 조치
1) 대한민국은 1993. 6. 11.「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2) 피고는 1994. 8. 31.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총리담화’를 통하여 피고 정부는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훼손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인도적 견지에서 개별적인 위로금이나 정착금을 지급할 수 있고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의 조성 등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 대한민국은 2005. 1.경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하였다. 그 후 구성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민관공동위원회’라고만 한다)에서는 2005. 8. 26.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ㆍ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 동포 문제와 원폭 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표명하였는데, 위 공식의견에는 아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한일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피고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ㆍ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 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피고 정부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 ○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 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해 총액 결정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됨. ○ 그러나 75년 우리 정부의 보상 당시 강제동원 부상자를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도의적 차원에서 볼 때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였다고 볼 측면이 있음.
 
자.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1) 대한민국 정부와 피고 정부는 2015. 12. 28.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을 통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합의가 있었다는 발표를 하였다.
(피고 정부) ①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②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전 ‘위안부’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일ㆍ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합니다. ③ 일본 정부는 이상을 표명함과 함께,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합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ㆍ비판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후략)  (대한민국 정부) 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과 이번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가 앞서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한다. ②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ㆍ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③ 한국 정부는 이번에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ㆍ비판을 자제한다.
2) 2016. 7. 28. 피고의 예산으로 전액 출연한 돈을 사용하여 화해ㆍ치유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출연금 중 일부가 생존 피해자 또는 사망 피해자의 유가족 중 각 신청자에게 지원금으로 지급되었다.
 
차.  원고 등의 위안부피해자법에 따른 생활안정지원대상자 결정ㆍ등록
원고 등은 1993년경부터 2001년경까지 사이에 위안부피해자법에 의하여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여성가족부장관에 의하여 생활안정지원대상자로 결정ㆍ등록되었다.
 
카.  일부 원고 등의 사망 및 일부 소송수계
이 사건 소송계속 중 원고 1은 2014. 6. 8.에, 원고 2는 2017. 7. 23.에, 원고 6은 2018. 12. 5.에, 원고 7은 2016. 7. 10.에, 원고 8은 2018. 2. 14.에, 망 소외 1은 2015. 6. 11.에, 원고 12는 2016. 12. 6.에 각 사망하였고,망 소외 1의 자녀인 원고 10이 그 소송절차를 수계하였다.
[인정 근거] 갑 제2, 4, 5 내지 7호증, 13 내지 23호증(가지번호 있는 것은 가지번호 포함, 이하 같다)의 각 기재,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변론 전체의 취지
 
2.  원고들의 주장
원고 등은 일본제국이 침략전쟁 중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운영하였던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들이다. 일본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침략전쟁 수행을 위하여 ‘위안부’ 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하였고, ‘위안부’가 필요해지자 당시 식민지로 점령 중이었던 한반도에 거주하던 원고 등을 유괴하거나 납치하여 한반도 밖으로 강제 이동시킨 후 위안소에 감금한 채로 상시적 폭력, 고문, 성폭행에 노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원고 등에게 제대로 된 임금이나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이하 ‘이 사건 행위’라고 통칭한다)는 불법행위임이 명백하고, 이로 인하여 원고 등이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으므로, 일본제국의 후신으로서 동일성이 있는 피고에게 그 위자료의 일부로서 각 100,000,000원의 지급을 구한다.
 
3.  재판권 유무(국가면제의 적용 여부)에 관한 판단 
가.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법 이론의 흐름
1) 국가면제에 관한 전통적 국제법 이론
국가면제 또는 주권면제(이하 ‘국가면제’로 통칭한다)는 국내 법원이 외국국가에 대한 소송에 관하여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는 국제관습법으로서 국가는 그의 행위와 재산에 관하여 외국의 재판권에 강제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바, 이는 주권을 가지는 모든 국가들은 서로 평등하며 독립적이라는 국가의 기본적 원리 또는 ‘대등한 자는 다른 대등한 자에 대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par in parem non habet imperium)는 원칙 등에 근거하고 있다. 국가면제 개념은 주권평등원칙의 귀결로서 상호주의 관점에서 외국의 권위를 인정해 줌으로써 국가가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19세기 말까지 널리 지지되었다.
2) 제한적(상대적) 국가면제 이론의 대두
국가면제 개념은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제한되면서 다수의 국가에서는 사법적(私法的)ㆍ상업적 행위 등에 대하여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국내법을 마련하거나 조약에 가입하고 있다. 여기에 반인륜적ㆍ반인권적 범죄행위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국가면제를 인정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나.  이 사건 행위가 사법적 행위로서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권이 있는지 여부에 관한 판단
1) 관련 법리
가) 대법원 판결
국제관습법에 의하면 국가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원칙이라 할 것이나, 국가의 사법적(私法的) 행위까지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국제법이나 국제관례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영토 내에서 행하여진 외국의 사법적 행위가 주권적 활동에 속하는 것이거나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에 대한 재판권의 행사가 외국의 주권적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가 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외국의 사법적 행위에 대하여는 당해 국가를 피고로 하여 우리나라의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1998. 12. 17. 선고 97다39216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 2011. 12. 13. 선고 2009다16766 판결 등 참조).
나) 헌법재판소 결정
국제관습법상 국가의 주권적 활동에 속하지 않는 사법적(私法的)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헌법재판소 2017. 5. 25. 선고 2016헌바388 전원재판부 결정 참조).
2) 판단
원고들은 일본제국의 이 사건 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입은 손해의 배상을 구하고 있는바, 우선 이 사건 행위가 재판권이 면제되지 않는 사법적(私法的) 행위인지 여부에 관하여 살펴본다.
원고들이 주장하는 이 사건 행위 중 일부에 민간업자들이 관여하였고, 그에 따라 일부분 그들의 상업적 이익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었을 것으로도 보이나, 원고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더라도 이 사건 행위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사법적, 상업적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고, 주권적 행위라고 봄이 상당하다.
① 이 사건 행위로 인하여 일본제국이 달성하려던 목적은 일본군인들의 신체적ㆍ정서적 안정, 군대의 효율적인 통솔과 통제 등으로 보이며, 군대의 보유와 지휘는 국가의 행위 중 가장 권력적 행위 중 하나에 해당한다.
② 원고들이 주장하는 이 사건 행위에는 군대 외에도 여러 국가기관들이 관여하였는바, 위와 같은 국가기관들이 사경제주체로서의 이익달성 등을 목적으로 상대방과 동등한 지위에서 이 사건 행위들을 자행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③ 이 사건 행위의 배경에는 당시 일본제국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기한 법령의 정비, 예산의 배정 등이 있었다.
 
다.  주권적 행위에 대한 재판권 유무에 관한 판단
1) 논의의 전제
대한민국 성문법에 의하여 국가면제의 예외 사유를 정하지 아니하였고, 대한민국이 유효하게 비준한 국제조약이나 피고와 사이에 체결한 조약이 없는 이상 일본제국의 주권적 행위에 대하여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권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국제관습법에 의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에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적인 흐름을 먼저 검토한 다음 이를 판단하기로 한다.
2)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협약 및 각국의 입법 동향 등
가)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협약
유럽공동체의 국가들은 1972. 5. 16. ‘국가면제에 관한 유럽협약’(European Convention on State Immunity, 이하 ‘유럽협약’이라고 한다)을 체결하였고, UN총회는 UN 국제법위원회(ILC)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2004. 12. 2. ‘유엔국가면제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Jurisdictional Immunities of States and Their Property, 이하 ‘유엔협약’이라고 한다)을 채택하였는데, 유럽협약 및 유엔협약에서는 예외적인 경우에 국가면제를 부인하는 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나) 각국의 입법 동향
미국은 1976년「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 FSIA)을 제정하였는데 위 법률에서는 상업적 활동, 국제법을 위반하여 취득된 재산과 관련된 소송, 상속 또는 증여에 의하여 취득된 미국 내의 재산에 대한 권리 또는 미국 내에 소재하는 부동산에 대한 권리에 관한 소송, 외국에 의하여 또는 외국이 고용한 직원의 직무수행과정에서 취하여진 불법의 작위 또는 부작위가 원인이 되어 미국 내에서 발생한 인적 피해 또는 사망에 대하여 그 외국을 상대로 금전배상이 청구되는 경우, 외국 소유의 선박을 상대로 제기된 해사소송으로서 그 외국의 상업적 활동과 관련된 경우 등에 있어서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영국은 1978년「국가면제법」(State Immunity Act)을 제정하였고, 일본도 2009년「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外?等に?する我が?の民事裁判?に?する法律)을 제정하였으며, 싱가포르도 1979년「국가면제법」(State Immunity Act)을 제정하였는데, 위 각 법률에서는 예외적으로 국가면제가 배제되는 경우를 제한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에서도 국가면제의 예외를 정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다) 유엔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이하 ‘ICJ’라고 한다) 판결 등
(1) 이탈리아인 Ferrini는 1944. 8. 4. 독일군에 체포되어 독일의 군수공장에서 1945. 4. 20.까지 강제노역을 하였으나 전쟁포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자 1998년에 이탈리아 Arezzo 지방법원에 독일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였고, 위 법원은 독일의 국가면제 원용 주장을 인정하여 소를 각하하였으며, 항소심법원도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4. 3. 11. 강행규범을 위반하는 국제범죄에 해당하는 국가의 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하였고, 이에 하급심법원은 원고 승소판결을 선고하였다.
(2) 독일은 2008. 12. 23. 위 Ferrini 판결 이후에도 이탈리아 내에서 독일을 상대로 제기된 다수의 사건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이 거듭되자 ‘독일이 국제법상 누리는 국가면제를 존중하지 않는 이탈리아의 재판 실행에 의한 국제법상의 의무 위반’을 이유로 이탈리아를 ICJ에 제소하였는데, ICJ는 2012. 2. 3.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서는 유럽협약과 유엔협약이 적용되지 아니하므로 국제관습법에 의하여 이탈리아에 독일에 대한 재판권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여야 할 것임을 전제로, ‘국가면제는 UN헌장 제2조 제1항이 천명하여 국제법 질서의 기본적인 원칙의 하나인 국가의 주권평등원칙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의 국가실행에 깊숙이 자리 잡은 국제관습법의 일반원칙으로 채용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즉 ICJ는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은 무력충돌 상황에서 국가의 무장병력 및 관련 기관에 의한 개인의 생명, 건강, 재산 침해에 관한 민사소송절차에서도 적용되므로, 독일에 대한 재판권의 면제를 부인한 이탈리아 법원의 결정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ICJ는 국가면제 원칙은 절차적인 요건으로서 국제인권법이나 무력충돌에 관한 법 위반사실이 중요하다는 실체적 주장에 의하여 면제를 박탈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한 국가가 다른 국가로부터 재판을 면제받을 권리는 그 국가가 국제적인 책임을 지는지 여부 및 배상의무가 있는지 여부와 분리되는 문제로서 국가면제가 배상의 확보를 위한 대안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3) ICJ 판결 이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14. 10. 22. 국가면제의 국제관습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사법에의 접근권을 근간으로 하는 이탈리아 헌법 질서의 기본적 가치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국내법 질서에 수용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단을 하였다.
3) 판단
국가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원칙이라는 국가면제의 국제관습법에 의하더라도 위 국제관습법이 국가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재판권이 면제되므로 주권을 가진 국가라면 예외 없이 타국의 재판권의 행사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볼 수는 없고, 일정한 경우에는 그 예외가 인정되어야 할 것인데, 위 기초 사실에 앞서 본 각 증거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행위는 위 기초 사실 및 아래의 제5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일본제국에 의하여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며, 당시 일본제국에 의하여 불법점령 중이었던 한반도 내에서 우리 국민인 원고 등에 대하여 자행된 것으로서,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재판청구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재판청구권은 기본권이 침해당하거나 침해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에 대한 구제 또는 예방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점에서 다른 기본권의 보장을 위한 기본권이라는 성격을 가진다[헌법재판소 2018. 12. 27. 선고 2015헌바77, 2015헌마832(병합) 전원재판부 결정]. 권리구제의 실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재판받을 권리는 다른 실체적 기본권과 더불어 충분히 보호되고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이다. 또한 1948. 12. 10. UN총회에서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제8조에서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하였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본권 규정에 비추어 보면, 기본권의 보장을 위한 실효적인 권리인 재판받을 권리를 제한함에 있어서는 지극히 신중하여야 한다.
② 국가면제는 실체판단에 들어가기 이전에 재판권이 있는지 여부에 관한 판단에서 적용되는 이론으로서 절차적 요건에 관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절차법은 실체법상의 권리와 상태를 가장 잘 구현하도록 구축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절차법은 실체법 질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절차법이 불충분하여 실체법상의 권리 실현이 제한되거나 실체법 질서가 어느 정도 변용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그로 인해 실체법상의 권리나 질서가 형해화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대법원 2018. 10. 18. 선고 2015다232316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③ 국가면제 이론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가치가 아니다.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라서 계속하여 수정되고 있으며, 이는 유럽협약, 유엔협약 등 국제협약에서 절대적 국가면제 이론에서 벗어나 일정한 경우 국가에 대한 재판권을 면제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미국의「외국주권면제법」, 영국의「국가면제법」, 일본의「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 싱가포르의「국가면제법」등 여러 국가의 국내법에서 국가면제가 인정되지 않는 예외 사유를 정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아도 그러하다. 이러한 변천은 국제법 체계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④ 국가면제 이론에서는 ‘무력분쟁(전쟁) 수행 중’에는 예측불가능한 손해 발생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때에 행하여진 행위에 대하여는 재판권이 면제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으나, 태평양전쟁의 전선은 중국,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이었고 당시 한반도는 전쟁의 장소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이 ‘위안부’ 동원을 위하여 원고 등을 기망, 납치, 유괴한 행위는 ‘무력분쟁 수행과정 중’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⑤ 1969년 체결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53조는 ‘일반 국제법의 절대규범은 그 이탈이 허용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일반 국제법의 추후의 규범에 의해서만 변경될 수 있는 규범으로, 전체로서의 국제공동사회가 수락하여 인정하는 규범’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위와 같은 국제사회의 합의에 비추어 보면 국제법규에도 상위규범인 ‘절대규범’과 하위규범 사이에 구별이 있으며, 하위규범은 절대규범을 이탈하면 아니 된다고 할 것이다. 이때 절대규범의 예로서 ILC의 2001년 ‘국제위법행위에 대한 국가책임 협약 초안(Draft Articles on Responsibility of States for Internationally Wrongful Acts)’ 해설에서 거시한 침략금지, 노예제 및 노예무역 금지,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금지, 인종차별 및 인종분리 금지, 고문금지, 무력충돌 시 국제인도법의 기본원칙, 민족자결권 등을 들 수 있겠다.
⑥ 법을 해석ㆍ적용할 때에는 그 결과를 고려하여야 할 것인데, 해석의 결과 심히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결론이 도출된다면 그러한 해석을 배제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통상 이를 위하여 논리적ㆍ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 등 여러 해석방법이 동원되고, 이러한 해석방법이 헌법 규정과 법의 원리에 부합하고 이를 최대한 실현하는 합헌적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피고가 된 국가가 국제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반인권적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가하였을 경우까지도 이에 대하여 최종적 수단으로 선택된 민사소송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합리하고 부당한 결과가 도출된다고 할 것이다.
㉮ 관습법이란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한 사회생활규범이 사회의 법적 확신과 인식에 의하여 법적 규범으로 승인ㆍ강행되기에 이른 것을 말하고, 그러한 관습법은 법원(法源)으로서 법령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법칙으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이고, 또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한 어떤 사회생활규범이 법적 규범으로 승인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기 위하여는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전체 법질서에 반하지 아니하는 것으로서 정당성과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사회생활규범은 비록 그것이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법적 규범으로 삼아 관습법으로서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대법원 2005. 7. 21. 선고 2002다1178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국가면제가 관행으로 정착된 국제관습법이라고 하더라도, 피고가 인도에 반하는 중대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까지 피고에 대한 재판권을 면제한다는 내용의 관습법을 적용하게 되는 경우,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의 국민에 대하여 인도에 반하는 중범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 여러 국제협약에 위반됨에도 이를 제재할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은 헌법에서 보장한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여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불합리하며,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법질서 전체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아니하여 정당성이 없으므로, 그와 같은 경우까지도 국가면제를 적용하는 국제관습법으로서의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에도 원고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는 드러나지 아니한 채 한일 양국 간 배상이나 보상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스스로 입을 열어 피고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부터 논의의 쟁점이 되었고, 피고는 관방장관 담화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운영하였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하여 정부 차원에서 사과를 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보상 혹은 배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피고의 법원에 여러 차례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모두 기각되거나 각하되었고,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법원에 제기한 소송의 결과 또한 같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피고 정부 간의 청구권협정과 2015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또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배상을 포괄하지 못하였다. 협상력이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하는 개인에 불과한 원고들로서는 이 사건 소송 외에 구체적인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이 요원하다.
⑦ 국가면제 이론은 주권국가를 존중하고 함부로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절대규범(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하여 타국의 개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국가가 국가면제 이론 뒤에 숨어서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하여 형성된 것은 아닐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의 해석에는 예외를 허용해야 함이 상당하다.
 
4.  국제재판관할권 유무에 관한 판단 
가.  관련 법리
국제사법 제2조 제1항에서 “법원은 당사자 또는 분쟁이 된 사안이 대한민국과 실질적 관련이 있는 경우에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진다. 이 경우 법원은 실질적 관련의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 국제재판관할 배분의 이념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제2항에서 “법원은 국내법의 관할 규정을 참작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의 유무를 판단하되, 제1항의 규정의 취지에 비추어 국제재판관할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당사자 간의 공평, 재판의 적정, 신속 및 경제를 기한다는 기본이념에 따라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하여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편의 그리고 예측가능성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재판의 적정, 신속, 효율 및 판결의 실효성 등과 같은 법원 내지 국가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여야 하며, 이러한 다양한 이익 중 어떠한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을지 여부는 개별 사건에서 법정지(法庭地)와 당사자의 실질적 관련성 및 법정지와 분쟁이 된 사안과의 실질적 관련성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대법원 2010. 7. 15. 선고 2010다18355 판결,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등 참조). 이때 예측가능성은 피고와 법정지 사이에 상당한 관련이 있어서 법정지 법원에 소가 제기되는 것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대법원 2019. 6. 13. 선고 2016다33752 판결 참조). 또한 국제재판관할에 관하여 조약이나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상의 원칙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고 이에 관한 우리나라의 성문법규도 없는 이상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에 관한 규정 또한 위 기본이념에 따라 제정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위 규정에 의한 재판적이 국내에 있을 때에는 섭외적 사건에 관한 소송에 관하여도 우리나라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인정함이 상당하다(대법원 1992. 7. 28. 선고 91다41897 판결 등 참조).
 
나.  판단
앞서 본 각 증거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동아시아와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제국이 그 군대의 운영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당시 불법적으로 점령 중이던 한반도의 대한민국 국민들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또는 유인, 기망하여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행위를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여 달라는 취지로서,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민법에 근거하여 피고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점, ② 위와 같은 일련의 불법행위 중 일부가 대한민국 영토인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점, ③ 피해자들인 원고 등이 대한민국 국민이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점, ④ 이 사건 행위가 이루어진 위안소 등의 물적 증거는 시간의 경과와 전쟁 등으로 거의 소실되었고, 위안소 운영자 혹은 이용자들의 인적 증거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아니하며, 앞서 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기초자료, UN 인권위원회에서의 조사보고서 등의 자료가 이미 발표되었으므로 피고 현지 등에서의 증거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 ⑤ 원고 등 외에 여러 ‘위안부’ 피해자들은 피고의 국내 법원, 미국의 법원 등 세계 여러 국가의 법원에 위와 같은 일본제국의 불법행위를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을 줄곧 청구하여 왔는바, 원고들의 생활근거지인 대한민국 법원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피고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 ⑥ 국제재판관할권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병존할 수 있으므로, 이 사건이 피고와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이 당연히 배제된다고 볼 수 없는 점, ⑦ 달리 소송당사자의 공평 내지 재판의 적정, 증거수집의 용이성이나 소송수행의 부담 정도 등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할 때 피고에게 그 응소를 강제하는 것이 민사소송의 이념에 비추어 보아 심히 부당한 결과에 이르게 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점 등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보면, 대한민국은 이 사건의 당사자들 및 분쟁이 된 사안과 실질적 관련성이 있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하여 국제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5.  본안에 관한 판단 
가.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1) 준거법의 결정
이 사건에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법은 법정지인 대한민국에 있어서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의 결정에 관한 규범(이하 ‘저촉규범’이라고 한다)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앞서 본 인정 사실에 따르면 피고의 불법행위와 그로 인한 손해의 발생 등의 법률관계는 구 섭외사법(1962. 1. 15. 법률 제996호로 제정된 것, 이하 같다)이 시행된 1962. 1. 15. 이전에 발생하였다. 구 섭외사법 제정 이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은 1912. 3. 28.부터 일왕(日王)의 칙령 제21호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의용(依用)되어 오다가 군정법령 제21호를 거쳐 대한민국 제헌헌법 부칙 제100조에 의하여 현행법령으로서 대한민국 법질서에 편입된 일본의 법례(法例)(1898. 6. 21. 법률 제10호)이다. 원고 등의 청구권이 성립한 시점에 적용되는 위 법례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과 효력은 불법행위 발생지의 법률에 의하는데(제11조), 이 사건 불법행위지는 대한민국과 중국, 피고, 남양군도 등에 걸쳐 있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판단할 준거법은 대한민국법, 중국법, 일본법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을 묻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으므로, 피고의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판단하기로 한다(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참조).
나아가 제정 민법이 시행된 1960. 1. 1.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의 판단에 적용될 대한민국법은 제정 민법 부칙 제2조 본문에 따라 ‘구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다.
2) 이 사건 행위가 불법행위인지 여부에 관한 판단
가) 앞서 본 기초 사실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본제국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군인들의 사기 진작 및 민원 발생의 저감, 군인들에 대한 효율적 통솔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른바 ‘위안부’를 관리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고, 이를 제도화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군과 국가기관에서 조직적으로 계획을 세워 인력을 동원, 확보하였고,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안소’를 운영하였다.
10대 초중반에서 20세에 불과하여 미성년이거나 갓 성년이 된 원고 등은 빈한한 가사를 돕기 위하여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라는 등 민간업자 또는 일본제국의 공무원들의 기망에 속아서 지원하거나, 강제로 납치되거나 위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위안부’로 동원된 이후 원고 등은 일본제국의 조직적이고 직간접적인 통제하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군인들의 성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고, 그 횟수도 하루에 수십 차례에 이르렀을 만큼 참혹하였다. 어린 나이의 원고 등과의 성행위를 위하여 원고 등이 수용된 방에 군인들이 줄을 섰고, 이에 이용시간의 제한이 있을 정도였다. 원고 등은 가혹한 성행위 그 자체로 인한 상해뿐만 아니라 늘 성병과 원치 않은 임신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고 안정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산부인과 치료를 받아야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상시적 폭력에 노출되었고 제대로 된 의복과 식사를 보급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자유도 제압당하고 감시하에 생활하였다.
나) 피고의 현행 헌법(1946. 11. 3. 공포) 제98조 제2항에 의하면 ‘피고가 체결한 조약 및 확립된 국제법규는 성실히 준수’하여야 하는데 현행 헌법 제정 전이라고 하더라도, 위 조항은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서의 당연한 의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이므로 현행 헌법 성립 전의 일본제국 또한 조약 및 국제법규를 성실하게 준수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행위는 일본제국이 그 당시까지 비준하였던 ① 헤이그 육전협약 제3조, 부속서 제46조상의 ‘가족의 명예와 권리를 존중하여야 할 교전당사자의 의무’를 위반하여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여 그 명예와 권리를 존중하여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것이며, ② ‘백인노예매매의 억제를 위한 국제조약’에서 금지한 성매매 및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납치,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조항을 위반하였고, ③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조약’상 미성년 여성을 기망, 납치하는 행위를 한 것이며, ④ 국제연맹의 ‘노예협약’상 노예해방규정(국제연맹하의 임시노예제위원회에서는 노예를 ‘소유권에 수반하여 일부 또는 모든 권한의 행사가 제한되는 자의 지위 또는 상태’라고 보고 있기는 하나, 앞서 본 UN 인권소위원회의 맥두걸 보고서에서는 ‘위안부’를 ‘성노예’로 보고 있으며, 당시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하여 일부 또는 모든 권한의 행사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성적인 노예’로 보는 견해가 다수 있다)을 위반한 것이고, ⑤ ILO의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에서 여성의 강제노동을 즉시 폐지하기로 한 조항을 위반하였으며, ⑥ 당시 일본제국의 공무원들은 피고의 구 형법 제226조 등을 위반하였고 일본제국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방조하였다.
다) 1946. 1. 19. 공표된 극동국제재판소 헌장(일명 도쿄재판소 헌장) 제5조 (c)에서는 노예화 등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고, 이를 범한 전쟁범죄자들을 소급하여 처벌하였으며 1945. 11.에 시작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헌장 제6조 (c)에도 같은 규정이 있다.
라) 위 인정 사실에 이 사건 행위 당시의 국제조약, 일반적인 국제관습법과 일본제국의 국내법, 전후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헌장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앞서 인정한 이 사건 행위는 당시 일본제국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3) 소결론
앞서 본 일본제국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일본제국의 후신으로서 동일성이 인정되는 피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나마 배상할 의무가 있다.
 
나.  손해배상책임의 범위
과거 일본제국은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한 강제적인 인력 동원 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원고 등을 기망하거나 강제로 연행하여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하였고, 특히 원고 등은 나이 어린 여성들임에도 가족과 헤어져 거주이전의 자유 등을 박탈당한 채 위험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성행위를 강요당하였다. 원고 등은 그 과정에서 수없이 폭행당하였고, 기아와 상해, 질병 외에도 수시로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종전 이후에도 ‘위안부’이었다는 전력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불명예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두고두고 큰 정신적 상처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원고 등은 이후의 삶을 정상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없었다. 더구나 위와 같은 경험은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씻지 못할 회한으로 남았음이 명백하다.
이러한 가해행위의 불법성의 정도와 원고 등의 당시 연령 및 ‘위안부’로 고통받은 기간, 당시의 환경과 자유 억압의 정도 등 원고 등이 입은 피해의 정도, 원고 등이 귀국 후에 겪은 사회적ㆍ경제적 어려움, 불법행위 이후 상당한 기간 피해복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아니한 점, 기타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 등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가 지급하여야 할 위자료는 적어도 원고 등에 대하여 각 100,000,000원 이상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다.  소결론
따라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다만 원고들이 이 사건 청구 시 지연손해금을 구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지연손해금에 대하여는 별도로 판단하지 아니한다).
 
라.  보론 - 청구권 소멸 여부에 관한 판단
1) 청구권협정에 의한 청구권 소멸 여부
가)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인들의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 위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어 청구권협정의 체결로 소멸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살펴본다.
나) 앞서 본 각 증거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할 수 없다.
①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제국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다.
②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과와 그 전후 사정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은 일본제국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ㆍ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③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피고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아니하다.
④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피고는 일본제국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본제국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⑤ 대통령이나 관계 행정부서의 의견이 사법부의 판단을 구속할 수는 없으며,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되고, 국가가 조약을 통하여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임을 고려하면 조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조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이외에 국민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데, 청구권협정에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⑥ 민관공동위원회는 2005. 8. 26.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2) ‘2015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에 의한 청구권 소멸 여부에 관한 판단
앞서 본 각 증거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위 합의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위 합의에 의하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할 수 없다.
① 외교부는 2017. 7. 31. 장관 직속으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위원장 1명, 부위원장 2명, 민간위원 3명, 외교부 위원 3명)를 설치하여, 위 합의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였는데, 2017. 12. 27. 위 태스크포스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위 합의에 대하여, ‘양국 외교장관 공동 발표와 정상의 추인을 거친 공식적인 약속이며, 그 성격은 조약이 아니라 정치적 합의’라고 보았다.
② 위 합의가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 발표와 정상의 추인을 거친 공식적인 약속이기는 하지만 서면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상적으로 조약에 부여되는 명칭이나 주로 쓰이는 조문 형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합의의 효력에 관한 양 당사자의 의사가 표시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법적 권리ㆍ의무를 창설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헌법 제60조 제1항에서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ㆍ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헌법 제73조는 대통령에게 조약체결권을 부여하고 있고, 헌법 제89조 제3호에서 조약안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위 합의는 한일 양국 간 첨예한 갈등이 존재하는 문제이자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되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국무회의 심의나 국회의 동의 등 헌법상의 조약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간이한 내용의 조약으로서 관행에 따라 처리되는 고시류조약과 같이 조약번호를 부여하거나 고시하지도 않았으며, 이 점은 피고도 마찬가지이다.
④ 위 합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권의 행사 여부를 대한민국 정부에 위탁한 바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별도의 위임이나 법령의 규정 없이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처분할 수 없으므로 위 합의에 의하여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맞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⑤ 위 합의는 한일 양국 간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국가 대 국가로서의 정치적 합의가 있었음을 선언하는 데 그친 것이라고 보인다.
 
6.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모두 이유 있으므로 이를 인용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김정곤(재판장) 김경선 전경세